1395년 9월, 왕조의 위엄을 높이고 태평성대를 위해 조선은 새로운 도성을 계획하고 그 중심에 최초의 법궁, 경복궁을 세웠습니다. 북쪽으로 지금의 북악산인 백악을 주산으로 두고 남쪽에 남산인 목멱산, 동쪽에 낙산인 타락산, 그리고 서쪽에 인왕산이 둘러싸고 있습니다. 남북 직선축을 따라 중심 건물들을 차례로 놓고 그 주변에 건물들을 배치했습니다.
사정(思政), 거듭 생각해 올바른 정사를 펼쳐라.
근정(勤政), 부지런히 정사를 살펴라.
광화(光化), 그리하여 왕의 큰 덕이 온 나라를 비추리라.
경복궁은 조선의 이상을 담은 궁궐이었습니다.
[최종호 | 한국전통문화대학교 문화재관리학과 교수 ] :
“임금님이 나라를 위해서 정사를 보는 공간 그리고 사무를 보는 공간 그리고 침전의 공간 그 밖에도 외국 사신들과 함께 정사를 돌보던 다양한 공간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런 것들은 기본적으로 조선왕조가 유교 이념을 기반으로 해서 임금님이 백성을 하늘처럼 생각하고 소위 수기치인(修己治人), 자신을 다스리면서 백성을 다스리고 나라를 경영하는 이러한 개념이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전소된 후 약 270년간 폐허로 남겨지고 1865년 왕권 강화를 중시한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했지만 곧 비극을 맞고 맙니다.
1895년 일본 낭인들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면서 경복궁은 지어진 지 불과 30여 년 만에 폐허로 변해갔습니다. 주인을 잃은 경복궁 전각들은 일제에 의해 팔려나가며 외국인의 관람지로 전락합니다.
세자가 집무를 보던 전각은 당시 유행하던 요정으로 쓰였고 세자와 세자빈의 처소였던 자선당은 일본으로 팔려간 뒤 관동대지진으로 전각이 소실되어 그을린 석축만 남은 채 1996년 경복궁 뒤뜰로 돌아왔습니다.
문무과 과거시험을 치르던 융문당과 융무당은 일본인의 사찰로 전락.
선왕들의 어진을 모시고 제를 올리던 선원전은 이토히로부미 사찰, 박문사의 창고가 됐습니다
그리고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은 동문 옆으로 이전. 광화문이 있었던 자리는 조선총독부 광장으로서 각종 통치 행사의 장이 됩니다.
일제강점기 팔려가고 헐리고 사라져버린 전각의 수는 무려 470여 동. 중건 당시 규모의 90%가 넘는 숫자입니다. 끊임없이 자행된 일제의 경복궁 파괴는 민족의 혼을 말살하기 위한 음모였습니다.
[정현정 |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복원정비과 주무관 ] :
“고종 중건 당시 있었던 500여 동 가운데서 91년 복원을 들어왔을 때 근정전과 경회루 등 주요 건물을 포함한 약 36동 정도밖에 남아있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 건물과 그 부속건물들이 이미 경복궁 안에 많이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광화문 같은 경우에도 조선박람회 입구로 사용하려고 현재 민속박물관 입구 쪽으로 이전돼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지금의 위치가 아니었던 겁니다.”
2022년 경복궁은 제 모습 찾기에 한창입니다. 조선총독부청사가 철거된 자리에 흥례문과 금천을 복원했고 태원전도 다시 제 모습을 찾게 됐습니다. 광화문도 2010년 경복궁의 정문으로 제자리에 섰습니다.
2011년부터 2045년까지 진행되는 경복궁 2차 복원사업에서는 동궁 영역 가장 남쪽에 해당하는 계조당과 광화문 월대를 포함해 80여 개의 건물을 추가로 복원할 예정입니다.
[정현정 |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복원정비과 주무관 ] :
“경복궁은 아시다시피 조선의 법궁입니다. 태조 3년에 창건되어 조선의 역사를 상징하는 주된 법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사실은 가장 많이 파괴되고 훼철됐었습니다. 경복궁이 갖고 있는 상징은 단순하게 궁궐의 상징뿐만이 아니고 어떻게 보면 대한민국의 역사를 상징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하고 있는 경복궁의 복원사업은 대한민국의 역사를 다시 바로잡고 우수한 우리의 전통 기술들을 저희 후손들에게 보존하고 계승하고 있는 역할들을 할 수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사라진 것은 다시 살려 조선의 최초 법궁, 경복궁은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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