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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국: 축구의 기원을 밝히는 고대 중국의 공놀이

2025년 09월 11일 오전 1:43
당나라 시대에는 축국(蹴鞠, 중국의 전통 축구)이 매우 인기가 높아 황실에서도 즐기는 궁정 스포츠가 되었다. Linda Zhao | The Epoch Times당나라 시대에는 축국(蹴鞠, 중국의 전통 축구)이 매우 인기가 높아 황실에서도 즐기는 궁정 스포츠가 되었다. Linda Zhao | The Epoch Times

월드컵이나 각종 축구 대회가 열릴 때마다 전 세계가 열광하지만, 정작 이 사랑받는 스포츠의 가장 초기 형태가 유럽이 아닌 고대 중국에서 시작됐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2004년부터 국제축구연맹(FIFA)은 2천 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중국의 전통 축구인 축국(蹴鞠)을 가장 오래된 형태의 축구로 인정하고 있다.

축국의 기원

축국은 ‘전국책’과 ‘사기’ 같은 고전 문헌에서 기록을 찾아볼 수 있는데, 두 문헌 모두 전국시대 제나라의 수도였던 임치에서 축국이 크게 인기를 끌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축국’이라는 이름은 축(차다)과 국(공)을 합친 말이다. 청나라 학자 추인화(褚人獲)의 ‘견호수기’에 따르면, 초기 한나라 시대의 공은 가죽으로 만들어졌고 동물의 털을 채워 넣었다고 한다.

처음에 축국은 병사들의 체력 단련과 전술 훈련을 위한 군사 훈련의 일환으로 활용되었다. ‘사기’에는 “축국은 군사 전술을 반영한다. 무사를 단련시키고 그들의 실력을 보여준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나라 시대의 축국 규칙과 정신

축국은 한나라 때 더욱 체계화되었는데, 전술적 사고력을 기르고 인격 수양까지 도모하는 체계적인 활동으로 평가받았다.

학자 리유(李尤)는 ‘구장명(鞠場銘)’이라는 문헌을 남겼는데, 여기에는 당시 경기장의 구조와 경기 규칙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이 글에 따르면 축국 경기장은 음양 사상을 바탕으로 설계되었으며, 경기장 양쪽 끝에는 ‘초실(楚室)’이라 불리는 달 모양의 골대가 각각 6개씩 설치되어 있었다. 경기는 각 팀에 12명씩 총 24명이 참여해 진행되었다.

리유는 다음과 같은 경기 규칙뿐 아니라 공정한 스포츠 정신도 강조했다.

심판은 반드시 공정해야 하며 “사사로움 없이 편애하지 말라”고 했다. 선수는 냉정한 태도를 유지해야 하며 “화를 내지 말고, 남을 탓하지 말라”고 했다. 팀 주장과 심판은 선출을 통해 정하고, 모든 규칙은 일관성 있게 적용해야 한다고 했다.

또한 리유는 글의 말미에 “축국을 함에도 덕이 요구되는데, 하물며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얼마나 더 그러하겠는가?”라고 강조했다.

한편 한나라 시대에는 무려 25장 분량의 축국 전문 교본이 제작되었다는 기록이 ‘한서(漢書)’에 남아 있다. 이 교본은 축국의 기술과 전술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으로, 그 내용이 워낙 치밀하고 전략적이어서 군사학 서적으로 분류될 정도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당나라 이후 유실되었다.

당나라, 축국의 전성시대

618년부터 907년까지 이어진 당나라에 이르러, 기존의 단단한 공은 공기가 들어간 공으로 교체되었다. 이로 인해 공은 더 높이 튀어 오르고 민첩한 움직임이 가능해졌으며, 새로운 기법과 전략이 발전했다.

당대의 유명한 시인 왕유(王維)는 “공이 하늘 높이 날아올라, 새마저 그 아래로 지나갔다”는 시구로 축국의 박진감을 묘사했다.

이 시기 축국은 매우 인기가 높아 황실에서도 즐기는 궁정 스포츠가 되었다. 당태종과 현종 같은 황제들은 경기를 직접 관람했다. 승자에게는 비단을 상으로 줬는데, 이는 금은사로 장식된 화려한 비단 직물로 황실의 총애와 높은 지위, 그리고 큰 영예를 상징했다.

가장 높은 신분의 축국 선수

축국을 했던 황제들 중에서 송나라 태조 황제(960-1279)가 가장 높은 신분의 선수였다. 화가 소한천(蘇漢臣)이 그린 “태조황제축국도(太祖皇帝蹴鞠圖)”라는 그림은 태조가 공을 차고, 측근 신하인 조보(趙普)와 함께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네 명의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원본 그림은 이후 분실되었고, 현재 베이징 고궁박물원에 소장된 것은 남송 말기와 원나라 초기에 활동했던 화가 전선(錢選)이 그린 모사본이다.

세계 최초로 기록된 선발 포메이션

남송 시대의 기록인 ‘무림구사(武林舊事)’에는 32명의 선수로 구성된 완전한 라인업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세계 최초로 문서화된 선발 포메이션으로 추정되며, 각 포지션이 현대 축구와 유사했다.

대만 동오대학교의 연구에 따르면, 경기는 한 선수가 킥오프를 하고, 정해진 포메이션에 따라 다른 포지션의 선수들에게 공을 패스하는 방식으로 시작되었다.

선수들은 손을 사용할 수 없었고, 패스하는 동안 공이 땅에 닿으면 안 되었다. 이런 순서는 공이 킥오프를 한 선수에게 돌아올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그 선수가 ‘풍류안(風流眼)’이라고 불리는 골대를 향해 공을 차서 골을 시도했다. 골대는 두 개의 기둥 위에 높게 설치되어 있었다. 골을 넣으면 그 라운드의 승리로 인정되었다.

여성들도 참여했는데, ‘문헌통고(文獻通考)’에는 송나라 궁중에서 153명으로 구성된 여성 팀이 자수로 수놓은 옷과 은색 띠를 착용하고 많은 관중 앞에서 경기를 펼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쇠퇴와 유산

수백 년간 왕성했던 축국은 명나라와 청나라 시대에 들어 점차 쇠퇴했다.

명나라 홍무제는 고위 관료와 군인들이 지나치게 이 경기에 몰두하자 이를 금지했고, 위반 시 매우 가혹한 처벌을 내렸다. 일부는 발이 절단되는 처벌을 당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청나라에 이르러서는 축국이 더 이상 고상한 스포츠로 인식되지 않았고, 문화적 존재감도 사라졌다. 하지만 이 놀이는 세계 최초로 조직화된 축구의 형태를 갖추었으며, 전략, 규칙, 포메이션, 스포츠 정신 모두를 갖춘 역사적 유산으로서 스포츠 세계사에 풍부하고 놀라운 장을 제공하고 있다.

*이혜영 기자가 이 기사의 번역 및 정리에 기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