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룡이 서구에 전한 무술, 그리고 그것이 혈투로 변한 이야기

1960년대 습기와 땀 냄새로 가득 찬 홍콩의 한 도장에서 이소룡은 자신만의 무술 철학이 담긴 ‘절권도(截拳道)’를 만들어냈다. 그것은 민첩하고 폭발적이며, 완전히 혁신적인 무술이었다. 딱딱한 전통도, 형식적인 허례도 없었다. 물처럼 자연스러운 움직임과 정교한 기법만 있을 뿐이었다. 자유로움 그 자체였다.
이소룡은 이걸 세상과 나누고 싶어 했다.
그가 나누고자 했던 대상은 단순히 중국인들만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무술을 서구인들과도 나누고 싶어 했다.
무술은 신성한 규범이다
전통 무술계 원로들은 경악했다.
“여기에 그냥 놔두어라”라고 그들은 경고했다. “서구는 그 정신을 파괴할 것이다.”
이들에게 무술은 단순한 발차기와 주먹질이 아니었다. 그것은 신성한 규범이었다.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자, 몸과 함께 영혼을 다듬는 수행법이었다.
원로들은 무술이 함부로 퍼지면 겉보기에는 화려하고 돈벌이가 될지 몰라도 정작 중요한 것을 잃게 될 것을 염려했다. 무술을 진정으로 의미 있게 만드는 정신적 수양이 사라져 결국 공허한 껍데기만 남게 될 것이라고 우려한 것이다.
이소룡은 생각이 달랐다. 그는 무술을 국경과 언어의 벽을 넘나들 수 있는 보편적 진리로 봤다. 하지만 그가 기회를 본 곳에서, 원로들은 재앙을 예견했다.
안타깝게도 그들의 우려는 틀리지 않았다.
고대 아시아의 무술은 일종의 정신 수련법과 같았다. 도교의 균형, 불교의 고요함, 유교의 의리가 모두 녹아 있었다. 이 모든 가르침은 자아를 단련하고 마음을 닦기 위한 것이었다.

중국 철학자 공자(기원전 551~479년), 기원전 500년경. Photo by Rischgitz│Getty Images
싸움은 결코 무술의 목적이 아니었다. 깨달음이 목적이었다.
이소룡도 이를 알고 있었다. 그의 절권도는 자기 자신을 다스리고 수련하는 철학이었다. 그는 진정한 힘은 요란스럽고 과시적일 필요가 없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는 존재였다.
문제는 그가 서 있던 무대였다. 더 시끄럽고 자극적일수록 환영받는 곳이었다. 관객들은 수양보다 액션을 원했다.
무술이 예전에 무엇을 의미했는지 설명하는 역사적 일화가 필요하다면, 한신(韓信)의 사례를 살펴보자.
한신 장군의 교훈
한나라 명장 한신은 가난한 집안의 청년이었다. 하지만 그는 큰 뜻을 품고 있었고, 무술을 연마하던 그답게 언제나 칼 한 자루를 차고 다녔다. 어느 날 북적거리는 시장에서 동네 건달이 그를 가로막더니 전형적인 깡패식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는 “나를 죽이든지, 아니면 내 가랑이 밑으로 기어가든지 하라”고 하며 한신의 앞을 가로막고 서서 비웃었다.
웬만한 야심가라면 칼을 뽑았을 것이다. 하지만 한신은 달랐다. 무릎을 꿇고 그 건달의 다리 사이로 기어갔다. 주변 사람들의 비웃음과 조롱이 뒤따랐지만 견뎠고, 결국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났다. 자존심은 상했지만, 살인을 피할 수 있었다. 당시에도 사람을 죽이면 목숨으로 갚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몇 년 후, 그는 수만 대군을 지휘하는 장군이 됐다.

뛰어난 전략가였지만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던 한신. Blue Hsiao│Epoch Times
역사는 이 굴욕적인 순간을 ‘과하지욕(袴下之辱)’이라 부르며 최고의 인품을 보여준 사례로 기록하고 있다. 진정한 강함은 때리는 데 있지 않고, 때릴 필요를 느끼지 않는 데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였다.
*과하지욕(袴下之辱): ‘사타구니 아래의 굴욕’이라는 뜻으로, 한신이 건달의 가랑이 밑을 기어간 일화를 가리킨다. 당장의 굴욕을 참고 견뎌 나중에 큰일을 이뤘다는 의미로, 현재 중국에서는 ‘큰 뜻을 품은 자는 작은 굴욕쯤은 참을 줄 안다’는 교훈으로 널리 인용된다.
할리우드에 간 이소룡
이소룡이 할리우드에 진출하면서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그의 영화 <정무문>과 <용쟁호투>는 관객들을 열광시켰다. 그것은 역동적이고 화려했다. 덕분에 무술 도장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무술이 본격적으로 세계화된 순간이었다.
하지만 퍼진 건 영화 속 무술이었다. 뼈를 부러뜨리는 발차기, 슬로모션 점프 컷, 선(禪)보다는 괴성이 더 많이 담긴 버전 말이다.
정작 무술 정신은 촬영장 어딘가에서 사라져버렸다.
서구의 무술은 띠, 자랑거리, 박스오피스를 위한 도구가 됐다. 종합격투기는 모든 무술 전통을 아우르는 현대의 혼혈아가 되어 신성한 수련을 격투가 난무하는 스포츠로 바꿔놓았다. 철학적 절제는 유료방송으로 중계되는 케이지 매치에 자리를 내줬다. 무술 도장은 사업이 됐다. 열심히 훈련하고 땀을 흘려도 정신적으로는 한 뼘도 성장하지 않은 곳으로.
한신의 ‘과하지욕’ 이야기가 지금 이 시대에 전해진다면 그것은 분명 겁쟁이라는, 용맹의 부재로 해석될 것이다. 지배력을 보여주지 못한 실패로, 다시 말해 무술이 가르치려 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가장 아이러니한 건 이소룡 자신이다.
그는 정신과 몸, 그리고 영혼을 통째로 가르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서구는 현자가 아닌 스타를 원했다. 그의 번개처럼 빠른 주먹은 진리가 아닌 티켓을 팔았다.
인격과 수양에 대한 깊은 메시지는 번역 과정에서 사라졌다. 쌍절곤 소리와 네온사인 용 포스터 사이에서 그의 철학은 격투 장면으로 축소됐다.
전통 무술인들은 단순히 조심스러웠던 게 아니라 예언자였던 셈이다.
그럼 이제 어쩌란 말인가?
서구는 무술의 정수를 되찾을 수 있을까?
무술이 다시 ‘무기’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남을 제압하는 기술이 아니라,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엄숙하고 고요한, 평생에 걸쳐 닦아야 하는 수련의 의미를 되찾을 수 있을까?
답은 간단치 않다. 하지만 희망의 빛은 있다.
아직도 덕과 호흡법을 가르치는 사범들이 있다. 겨루기 전에 명상하는 제자들도 있다. 몇몇 무관에서는 여전히 자아 과시가 아닌 영혼을 단련한다.
한신의 교훈은 여전히 수 세기를 걸쳐 울려 퍼지고 있다. 진정한 무인(武人)은 자기 자신을 다스린다는 교훈 말이다. 이소룡의 꿈도 상처받고 왜곡됐지만, 여전히 희미하게 빛나며 우리에게 묻고 있다. 주먹질 너머 진짜 목적을 찾으라고 말이다.
무술이 다시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구경거리 이상이 되어야 한다.
‘도(道)’가 되어야 한다.
*이혜영 기자가 이 기사의 번역 및 정리에 기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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