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영화에 정치적 강요가 없던 시절이 그립다

이념에 물든 영화판, 잊혀진 순수한 감동의 미학
요즘은 영화를 보는 일이 조심스럽다.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예상치 못한 이념적 메시지가 불쑥 튀어나온다. 때로는 재미와 위트로 교묘히 위장해 ‘부르주아 사회’를 공격한다. 어떤 때는 특정한 사회 운동을 향한 일방적 응원이 드러나기도 한다. 그렇다 보니 영화가 예술의 영역을 벗어나 설교나 훈계의 도구가 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어떤 영화를 볼 것인지의 선택은 관객의 권리다. 시간과 돈을 들여서 보는 콘텐츠가 우리 삶의 근간을 부수려 하거나 ‘워크(woke·깨어 있는 시민)’ 이념을 주입하려 한다면, 우리에게는 외면할 자유도 있다. 정치적 코드를 심은 영화에 반복적으로 당하다 보니 점차 영화관을 찾는 발걸음이 뜸해졌다. 이념으로 오염된 영화에 인생의 소중한 시간을 쓰고 싶지 않다.
얼마 전 개봉한 실사판 ‘백설공주’도 그래서 건너뛰었다. 초기 홍보 단계부터 원작의 재해석을 넘어선 정치적 메시지와 이념적 기획이 감지됐다. 결과는 혹독했다. 투자금만 2억5000만 달러가 들어간 이 프로젝트는 엄청난 혹평 속에 디즈니 역사상 가장 실망스러운 결과 중 하나로 남게 됐다. 어째서 디즈니라는 거대 기업이 처음부터 실패가 뻔한 기획을 실행에 옮겼을까. 답은 ‘이념에 사로잡히면 이성이 마비된다’에 있다.
다행히 지금은 투비(Tubi) 같은 광고 기반 무료 스트리밍 서비스 덕분에, 과거의 명작들을 다시 찾아보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다. 넷플릭스, 아마존 프라임에 이어 미국에서 세 번째로 인기 있는 이 서비스에는 보고 싶은 영화가 모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숨겨진 보석 같은 작품들이 꽤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1981년작 ‘황금연못'(On Golden Pond)이다. 이 영화는 당시에도 고리타분하고 지루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전성기를 지난 헨리 폰다와 캐서린 헵번이라는 왕년의 인기 스타 이름값에 편승한 기획이라는 지적도 있었다.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진심 어린 연기와 섬세한 이야기로 관객을 사로잡는 영화였다. 1982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여우주연상, 각색상 등 3관왕을 차지하며 흥행과 작품성 모두 성공을 거뒀다.
영화는 미국 북동부 뉴잉글랜드의 여름 별장을 배경으로, 은퇴한 노교수(헨리 폰다)와 그의 아내(캐서린 헵번)의 인생 황혼기를 담담히 그린다. 노년의 외로움과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지만, 영화는 그것을 공포나 비극으로 다루지 않는다. 오히려 자연 속에서 소박한 일상을 즐기는 부부의 관계, 그리고 찾아온 딸 첼시(제인 폰다)와 남자친구의 아들이 보여주는 세대 간 화해가 잔잔한 감동을 준다.
극중 13살짜리 소년인 이 아들은 아빠의 새 여자친구를 향해 이미 뒤틀린 감정이 쌓인 상태다. 그러나 노교수와 보트 타기, 낚시, 수영 등을 함께 하며 얼었던 마음을 풀고 세월을 뛰어넘는 우정을 쌓는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월터’라는 이름의 송어가 있다. 오랜 세월 사람의 손을 피해 살아남은 이 ‘전설적인’ 물고기를 잡기 위해, 노교수와 소년은 여름 내내 강과 호수를 누빈다. 결국 송어를 낚는 데 성공하지만, 그 생명력을 존중해 다시 놓아주는 장면은 영화의 정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장면에서 문득 떠오르는 작품이 있다. 바로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딕’이다. 1851년 발표된 이 소설은 포경 산업에 대한 생생한 묘사와 함께, 한 인간의 광기 어린 집념이 어떻게 파멸을 부르는지 보여주는 걸작이다. 여러 차례 영화화되기도 했다.
‘모비딕’에서 주인공 에이허브 선장은 다리를 잃게 만든 흰고래(모비딕)를 쫓아 목숨을 건 항해를 한다. 그의 집착은 주변을 파괴하고, 결국 그 자신까지 삼켜버린다.
영화 ‘황금연못’의 낚시가 자연과 타인에 대한 배려를 강조한다면, ‘모비딕’에서의 낚시(고래잡이)는 집착이 불러오는 파국을 이야기한다. 두 작품은 공통된 소재를 가지고 전혀 다른 삶의 태도를 보여준다.
필자의 멘토였던 자유주의 경제학자 머레이 로스바드는 이런 영화를 ‘영화다운 영화(movie movie)’라고 불렀다. 감정이 살아 있고 흥미롭고 교훈도 주지만, 특정한 이념이나 교리를 강요하지 않는 작품 말이다. 오늘날 영화계에서는 이런 영화를 찾기 어려워진 듯하다.

로스바드 교수가 생전에 ‘황금연못’을 언급한 적은 없지만, 필자는 그가 이 작품을 좋아했으리라 믿는다. 극이 끝날 때까지 관객에게 어떤 이념적 메시지를 주입하려는 흔적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20세기의 많은 영화가 그랬다.
요즘은 다르다. 이념이 영화계를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정체성 정치, 소수자 운동, 역사 재해석 등 다양한 사회 담론이 영화에 깊숙이 개입했고 그 경계마저 희미해졌다. 마치 ‘모비딕’ 속 에이허브 선장이 주변의 모든 것을 파괴해 가며 모비딕의 숨통을 끊으려 했던 것처럼 모든 다른 가치와 이성을 무시하고 이념적 목표를 추구한다.
현재 이들이 사냥하려 하는 모비딕은 백인 기독교 문화와 그 기반이 되는 미국의 전통적 가치들이다. 이미 10여 년 전부터 일부 지식인들은 미국 건국 연도를 바꾸자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혐오에 반대한다면서 정작 자신들은 어떤 대통령에게 온갖 혐오를 뒤집어씌우며 전면전을 진행 중이다.
물론 어떤 대상을 향한 비판 자체가 잘못됐다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영화가 반드시 나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예술이 도구로 전락하는 순간, 관객은 불편해진다. 영화는 감동과 사유를 주는 매체이지, 진영 논리의 확성기가 아니다.
영화 ‘황금연못’ 속 헨리 폰다처럼 사냥(낚시)의 짜릿함은 즐기되 결국 물고기를 놓아주는 자세가 필요하다. 정치는 일종의 스포츠에 가깝다. 서로 경쟁하며 관찰력, 설득력, 수사력을 키우는 기회의 장이기도 하다.
좋은 영화가 다시 돌아올 수도 있다. 이미 그 조짐이 보인다. 워크(깨어 있는 시민) 이념은 예전과 달리 여러 영역에서 거부당하고 있다. 정부나 대기업에서 흘러 들어가던 자금도 끊겼다. 다만, 이념에 뿌리 내린 사고방식이 여전히 학계, 전문기관, 언론계 그리고 영화계에 남아 있다.
그래서 나처럼 상처받기 싫은 이들은 아직도 리뷰를 먼저 읽으며 정치색이 짙은 영화는 피한다. 이념의 광풍이 스크린을 휩쓸기 이전 시절의 고전 명작에서 위안과 아름다움을 찾는다.
* 원제 Movies Without Manipul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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