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진 한복판에서…스콧 오그레이디의 믿을 수 없는 생존 이야기

1990년 10월 18일 미국 정보기관들이 작성한 한 보고서는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의 해체와 그에 따를 불가피한 폭력 사태를 예고했다.
“유고슬라비아는 1년 안에 연방 국가로서 기능을 멈출 것이며 2년 안에는 아마 해체될 것”이라고 보고서는 밝혔다. “경제 개혁은 해체를 막지 못할 것이다. … 해체와 함께 심각한 공동체 간 갈등이 발생할 것이며 이후에도 계속될 것이다. 폭력은 통제 불가능하고 격렬할 것이다. 미국과 유럽의 동맹국들이 유고슬라비아의 통합을 유지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이 경고는 예언처럼 적중했다. 수십만 명이 목숨을 잃고 수백만 명이 삶의 터전을 잃은 유고슬라비아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가장 폭력적인 분쟁의 무대가 됐다.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독일이 다시 통일됐고 공산주의가 해체되고 냉전이 종식되던 시기에 민주주의 세계가 환호를 보냈지만 발칸반도에서는 기뻐할 일이 거의 없었다.
유고슬라비아는 급속히 해체돼 1991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가 독립을 선언했고 이어 1992년에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독립을 선포했다. 이에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는 1992년 새로운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을 구성했다. 지역 전역에 폭력이 만연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가장 심각했다. 이곳에서는 보스니아계 세르비아인들이 ‘대(大)세르비아’ 건설을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격렬한 민족 갈등에 휘말리며 보스니아 전쟁은 1992년 4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독립 선언과 함께 시작돼 1995년 말까지 이어졌다. 약 10만 명의 보스니아계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그리고 무슬림인 보슈냐크족이 목숨을 잃었으며 희생자 대다수는 보슈냐크족이었다.

NATO와 미 공군
전쟁 내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군은 주로 미국 공군력을 중심으로 분쟁 억제에 나섰다. 미국과 동맹국 공군은 1993년 4월 12일부터 1995년 12월 20일까지 진행된 NATO의 ‘비행 차단 작전(Operation Deny Flight)’의 일환으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상공에서 약 11만 회에 달하는 출격을 감행했다. 이들은 보스니아인들에게 인도적 지원을 제공하고 해상 봉쇄를 집행하며 비행 금지구역을 설정하기 위한 작전을 수행했다. NATO 공군은 세르비아 폭격기 4대를 격추하는 데 성공했지만 이러한 작전들은 전쟁 종식에는 부분적 성과에 그쳤다.
이 네 대의 세르비아 폭격기는 모두 같은 날인 1994년 2월 28일 F-16 전투기가 격추시켰다. 그러나 같은 맥락에서 보자면 보스니아계 세르비아인들도 NATO 항공기 네 대를 격추시켰으며 그중 하나는 미 공군의 F-16이었다. 이 미국 전투기 격추 사건은 미국 전쟁사에서 가장 놀라운 생존담이자 구조 작전 중 하나로 이어지게 된다.
비행하기 나쁜 날
1995년 6월 2일 오후 미 공군 제555전투비행대 소속 스콧 오그레이디 대위는 비행 차단 작전의 일환으로 통상적인 정찰 비행 임무를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29세였던 오그레이디 대위는 33세인 로버트 라이트 대위와 함께 각자의 F-16 파이팅 팰컨 전투기에 탑승했다. 이탈리아 아비아노 공군기지에서 출격한 오그레이디는 마지막 임무를 수행한 지 열흘이 지나 있었고 원래 이날은 비행 일정이 잡혀 있지 않았다. 그러나 비행 일정에 결원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자청해 공백을 메꾸려 비행에 나섰다. 오후 1시 15분, 오그레이디는 호출명 ‘배셔 파이브-투(Basher Five-Two)’로 공중에 떠올라 아드리아해를 넘어 적대 지역으로 향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내전은 여름을 앞두고 더욱 악화돼 있었다. 지상에서는 각 세력 간 충돌이 격화되고 있었고 특히 보스니아계 세르비아인들은 NATO군에 대해 점점 더 적대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NATO군이 그해 5월 제한적인 공습을 실시하자 보스니아계 세르비아군은 유엔 평화유지군 약 400명을 인질로 잡아 인간 방패로 이용했다. 이어 7월에는 세르비아군이 유엔의 안전지대였던 스레브레니차를 공격해 약 8000명의 무슬림을 학살했다. 라이트와 오그레이디의 비행은 이 두 사건의 정중앙 시점에 벌어진 일이었다.
F-16 파이팅 팰컨은 500발의 20mm 다관총과 공대공 미사일 6기를 장착할 수 있으며 마하 2의 속도와 최대 5만 피트(약 15.2km) 고도까지 도달할 수 있다. 하지만 이날 비행에서 라이트와 오그레이디는 시속 500마일(약 800km)로, 고도 2만7000(약 8.2km) 피트 상공을 안정적으로 비행하고 있었다. 두 대의 F-16 전투기는 보스니아 비하치 남쪽에서 타원형 경로로 순찰 비행 중이었다.
적의 매복

“배셔 파이브-원, 적 신호 여섯, 방위각 090.” 라이트 대위가 오그레이디에게 무전을 보냈다. 라이트의 레이더가 그들의 위치 동쪽에서 위협 신호를 감지한 것이다. 하지만 그 신호는 포착되자마자 곧 사라졌다. 만약 그것이 실제 위협이라면 지대공 미사일(SAM)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두 조종사는 잘 알고 있었다. 다행히도 F-16 전투기는 신속한 레이더 감지가 가능했다. 물론 그 전제는 적군도 레이더를 작동 중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수천 피트 아래에서 보스니아계 세르비아군 병사들이 SA-6 지대공 미사일을 발사 위치로 이동시키고 있었다. 그들은 비교적 쉽게 F-16의 비행 패턴을 추적할 수 있었고 위치를 파악한 뒤 예측 가능한 경로에 따라 미사일 발사 준비를 마쳤다. 그들은 미사일 발사 전까지는 레이더를 켜지 않았고 미사일이 공중으로 날아올라 전투기에 근접했을 때에만 레이더를 작동시켜 미사일이 표적에 잠금(락온)할 수 있도록 했다.
오후 3시 3분, 최초 위협 신호가 감지됐던 근처에서 오그레이디가 경고음을 받았고 라이트는 받지 못했다. 이는 우연이 아니었다. 오그레이디는 곧장 SAM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흰 연기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F-16의 레이더가 SA-6을 탐지했을 때는 이미 적이 3M9 미사일 두 발을 발사한 이후였다. 이 미사일은 마하 2.3으로 비행하는 표적을 추적할 수 있으며, 최고 속도 마하 2.8, 최대 고도는 거의 4만 피트(약 12.2km)에 달한다. 오그레이디의 파이팅 팰컨은 완전히 사정거리 안에 들어가 있었다.
‘배셔 파이브-원’ 추락하다

첫 번째 미사일은 오그레이디 근처에서 폭발했지만 그를 비껴갔다. 그러나 두 번째 3M9 미사일은 직격해 F-16 전투기를 두 동강 내고 불덩어리로 만들어버렸다. 오그레이디가 탄, 화염에 휩싸인 조종석 캡슐은 짙은 구름 속으로 떨어졌고 그 탓에 라이트 대위는 시야를 확보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오그레이디 탈출 여부를 확인할 수도 없었다.
오그레이디에게는 두 가지 불가능해 보였던 일이 순식간에 일어났다. 자신의 F-16이 직격탄을 맞았고, 자신은 그 폭발에서 살아남은 것이다. 그는 이제 전쟁으로 폐허가 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시골로 낙하하고 있었다.
그 불행한 착륙 속에서도 다행이었던 점이 있다면 착지한 지역이 울창한 숲과 동굴이 많은 곳이었다는 점이다. 지면에 발이 닿는 즉시 그는 낙하산을 벗어 던지고 도망쳤다.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했다. 그는 바냐루카와 비하치 사이, 즉 보스니아계 세르비아군의 양대 거점 중간에 착지했으며 현지 주민들은 폭발을 목격했고 그가 낙하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지상에 있던 모두가 나를 볼 수 있었다”라고 그는 회상했다. “그들은 그저 거기 앉아서 내가 내려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4분도 채 지나지 않아 현지 준군사 조직 병력들이 현장으로 몰려들었고 오그레이디로부터 5피트(약 1.5m) 거리까지 접근했다. 그는 올리브색 점프슈트를 입고, 초록색 장갑으로 귀를 덮고, 얼굴을 땅에 파묻은 채 근처 덤불 속에 몸을 숨겼다. 그는 그 자리에서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무려 8시간을 버텼다.
생존 본능
밤이 되자 그는 조심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생존 조끼에 연결된 양방향 무전기를 이용해 NATO군과의 접촉을 시도했지만 들려오는 건 잡음뿐이었다. 그는 배터리를 아끼기 위해 무전기를 최소한으로만 사용해야 했다. 게다가 서두르다 보니 예비 무전기를 놓고 온 상태였다. 식수의 절반도 두고 왔다. 적진 한가운데서 얼마나 오래 버텨야 할지 알 수 없었기에 그는 물을 최대한 아껴야 했고 비가 오기를 기도했다.
무전기와 식수 외에도 오그레이디는 스위스 아미 나이프, 9mm 베레타 권총, GPS 수신기, 도주 지도, 그리고 11개 언어로 인쇄된 쪽지를 지니고 있었다. 그 쪽지에는 “이 공군 조종사를 적으로부터 숨겨주는 자에게 미국 정부가 보상하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러나 이 뜻밖의 여정에서 그가 가진 가장 중요한 자산은 바로 훈련이었다. 그는 워싱턴주 페어차일드 공군기지에서 실시되는 19일간의 생존·회피·저항·탈출(SERE) 필수 훈련을 수료한 상태였다.
그는 이러한 상황에서 겪게 될 심리적·육체적 스트레스에 대비하는 훈련을 받았으며 먹을 수 있는 식물인지 판별하는 방법도 배웠다. 그는 나뭇잎과 식물, 개미 등을 대용 식품으로 삼았다. 사흘째 되는 날 그의 식수는 바닥났다. 다행히도 6월의 보스니아는 강수량이 풍부했으며 넷째 날 밤에 마침내 비가 내렸다. 그는 지퍼백에 가능한 한 많은 빗물을 모았다. 낮에는 계속 은신하며 밤이 되어서야 천천히 조용히 움직였다.
미군은 오그레이디 대위를 포기하지 않았다. 라이트 대위는 오그레이디가 탈출하는 장면을 보지 못했지만, 그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은 여전히 품고 있었다. F-16 조종사들은 계속 임무를 수행하며 동시에 무전을 통해 오그레이디와 접촉을 시도했다. 국가안보국(NSA)은 오스트레일리아 파인갭 기지를 통해 정찰 위성을 가동하며 그의 위치를 추적했다. 빌 클린턴 대통령은 국가안보보좌관 앤서니 레이크로부터 이 상황에 대해 지속적으로 보고받았다. 미군과 NATO 동맹국들이 오그레이디 수색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지만 보스니아계 세르비아군의 준군사 조직들 역시 그를 찾고 있었다. 사실 보스니아계 세르비아군은 오그레이디의 수색 작전을 중단했는데 이는 그를 살해할 경우 국제적 책임을 지게 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접속과 구조

오그레이디는 낮 동안은 전혀 움직이지 않고 밤에만 느리고 신중하게 이동했다. 체력과 체내 수분을 유지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행동한 결과 추락 지점으로부터 2마일(약 3.2킬로미터) 이상은 이동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반드시 도달해야 한다고 생각한 지점이 있었다. 그는 무전 연락이 가능할 것으로 판단한 언덕 꼭대기를 찾아냈다.
밤의 어둠 속 언덕 위에서 오그레이디는 다시 무전기를 작동시켰다. 그와 동시에 하늘을 비행 중이던 토머스 핸퍼드 대위가 무전으로 “배셔 파이브-투”를 호출하고 있었다. 핸퍼드의 호출이 전파를 타고 도달했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1995년 6월 8일 새벽 2시 08분, 오그레이디는 이렇게 응답했다. “배셔 파이브-투 응답합니다. 살아있습니다. 도와주세요!” 혹시 세르비아군의 속임수일 수 있음을 염두에 둔 핸퍼드는 오그레이디에게 사전 협의된 퀴즈를 통해 본인 확인을 요구했고 오그레이디는 정확히 답했다.
핸퍼드는 즉시 이 정보를 전달했다. 그 시각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앞바다 아드리아해에는 상륙함 커사지함이 대기 중이었다. 이는 제8상륙전단의 기함이었고 그 안에는 당시 마틴 번트 대령이 지휘하는 제24해병원정대(MEU)가 탑승해 있었다. 특수 작전 능력을 갖춘 이 MEU 부대는 오그레이디의 F-16이 격추된 순간부터 사실상 구조 준비 태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NATO 남유럽 연합군 총사령관이자 미 해군 유럽 사령관이었던 레이튼 스미스 제독은 번트 대령에게 명령했다. “구조 부대를 출동시켜라.”
무장하고 위장페인트를 칠한 해병대원 40명이 두 대의 CH-53 슈퍼 스탤리언 헬리콥터에 탑승했다. 이들은 두 대의 AH-1W 슈퍼코브라 공격헬기, 두 대의 AV-8B 해리어 전투기, 두 대의 EA-6B 프라울러 전자전기, 두 대의 F/A-18D 호넷, 두 대의 A-10 워트호그, 그리고 F-16 전투기들의 엄호를 받았다. 총 40대의 항공기가 동원됐다. 오전 5시, MEU의 항공기 및 인원 전술 구조 작전(TRAP)이 시작됐다. 헬리콥터가 오그레이디의 위치에 도달하는 데 걸린 시간은 50분.
“고개를 들었더니 미 해병대 헬리콥터가 적대 지역 지평선 너머에서 내 생명을 구하러 날아오고 있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애국자지만 그 순간만큼 미국인이란 사실이 자랑스러웠던 적은 없다.”
오그레이디는 조명탄으로 자신의 위치를 표시했고 첫 번째 스탤리언 헬기가 착륙하자 해병 20명이 뛰어내려 주변을 확보했다. 두 번째 헬기에서 병력이 내리기 전에 오그레이디는 권총을 손에 든 채 뛰어나와 착륙한 해병들에게 달려갔다. 그는 즉시 무장을 해제하고 헬리콥터 안으로 이동됐다. 몇 분도 지나지 않아 두 대의 슈퍼 스탤리언은 시속 175마일(약 280km)로 커사지함을 향해 날아올랐다.
하지만 구조 작전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보스니아계 세르비아 준군사 조직은 무전 통신을 도청하고 있었고 곧 이들의 지상군이 헬리콥터에 소형 무기 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어깨에 메는 SA-7 미사일까지 발사됐다. 스탤리언 헬기들은 이를 피하기 위해 좌우로 격하게 기동했다.
미 동부 표준시 기준 오전 12시 49분, 백악관 전화가 울렸다. 클린턴 대통령이 전화를 받았다. 전화 너머엔 앤서니 레이크 보좌관이 있었다. 그의 보고는 간결했다. “데려왔습니다.”
전쟁으로 파괴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적진 한복판에서 보낸 오그레이디의 6일간의 생존이 성공리에 끝나는 순간이었다.
*박경아 기자가 이 기사의 번역과 정리에 기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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