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포크타임스

재키 로빈슨의 인종 평등을 위한 조용한 투쟁

2025년 05월 03일 오후 3:09

1945년 8월 28일, 재키 로빈슨은 브루클린 다저스의 단장 브랜치 리키의 사무실에 들어섰다. 이 만남의 이유를 알지 못했던 로빈슨은 자신이 곧 미국 역사의 흐름을 바꿀 중대한 역할을 맡게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에릭 메타커스는 저서 『7인의 위대한 남자들』에서 이 순간을 재현했다. 리키가 로빈슨에게 브루클린 다저스에서 뛰어줄 것을 제안하자, 로빈슨은 놀람과 감격에 말을 잇지 못했다. 당시 흑인 선수들은 흑인 리그에서만 활약했을 뿐, 메이저리그에서 뛰는 일은 전례가 없었다. 로빈슨이 제안을 수락하자, 리키는 그가 이미 알고 있었을 사실을 덧붙였다. 피부색 때문에 수많은 언어폭력과 협박에 시달리게 될 것이라는 경고였다. 이어 리키는 로빈슨이 예상하지 못했을 조건을 제시했다.

“나는 맞서 싸우지 않을 용기를 가진 선수를 찾고 있어.”

브루클린 다저스의 미국 프로야구 선수 재키 로빈슨(1919~1972냔)이 원정 유니폼을 입고 베이스 옆에서 자세를 낮춰 공을 받을 준비를 하고 있다. 1951년 촬영. 로빈슨은 선수 생활 동안 내야 여러 포지션을 소화했으며 외야수로도 활약했다.⎟ Keystone/Getty Images

리키는 코트를 벗더니 곧 로빈슨 앞에 닥칠 여러 상황들을 연기하기 시작했다. 그가 묵는 것을 거부하는 호텔 직원, 식당 입구에서 그를 돌려보내는 웨이터, 그리고 경기장에서 그에게 욕설과 인종 차별적 비난을 퍼붓는 관중들. 리키는 자신의 사무실 한복판에서 이런 저주와 인종 차별적 조롱을 로빈슨에게 퍼부으며 그를 시험했다.

로빈슨은 리키가 던지는 모든 것을 묵묵히 견뎌냈다. 그는 이 제안을 깊이 고민했고, 그것이 오랫동안 꿈꿔온 야구를 할 수 있는 기회일 뿐만 아니라 인종 간의 관계를 개선할 수 있는 중대한 기회임을 깨달았다. 결국 그는 리키와 악수를 나누며 합의에 이르렀다. 그들의 머리 위, 리키의 사무실 벽에는 에이브러햄 링컨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로빈슨은 처음에 다저스의 마이너리그 팀인 몬트리올 구단에서 뛰었다. 그곳에서 그는 경기 중 쏟아지는 야유와 조롱에도 전혀 반응하지 않으며 시즌을 성공적으로 마쳤고, 1947년 봄 뉴욕에 있는 다저스 본팀에 합류했다. 그와 팀에게 결정적인 전환점이 된 것은 그의 첫 메이저리그 경기였다. 그 경기에서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감독 벤 채프먼은 몇몇 선수들과 함께 내내 인종 차별적 언사를 퍼부었다. 수년 후, 메타커스의 보도에 따르면 로빈슨은 자신의 1972년 자서전 『I Never Had It Made』에서 그 끔찍했던 오후를 이렇게 회상했다.

“1회 초 타석에 들어설 때, 나는 내 귀를 의심할 정도였다.”

다음 날 경기에서도 욕설은 더욱 노골적이고 악의적으로 변했다. 하지만 이번엔 로빈슨의 동료들이, 심지어 팀에 그가 있는 것을 반대했던 이들까지도 나서서 그를 감쌌다. 2루수 에디 스탠키는 필리스 더그아웃을 향해 이렇게 외쳤다.

“이봐, 겁쟁이들아. 말대답할 수 있는 사람한테나 떠들어봐!”

메타커스는 이렇게 설명했다. “브랜치 리키는 팀의 반응에 크게 만족했다. 채프먼의 악의적인 의도는, 리키의 말에 따르면, ‘묶인 손으로 맞고 있는 동료를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던 서른 명의 선수들을 하나로 결속시켰다’는 것이다.”

재키 로빈슨과 그의 아내 레이첼이 1949년 7월 18일 워싱턴 D.C.의 캐피톨 힐 의사당 부지에 도착하고 있다.⎟AP Photo/연합

그러나 모욕과 학대는 여전히 계속되었고, 그것은 경기장 안에서만 벌어진 일이 아니었다. 일부 식당과 호텔은 로빈슨에게 서비스를 거부했고, 그의 집으로는 살해 협박 편지가 날아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빈슨은 시즌 내내 침착함을 유지했다. 단 한 번도 보복의 유혹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는 조롱과 욕설을 외면했고, 대부분의 경우 자신의 괴롭힘을 일삼는 자들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묵묵히 타석으로 걸어 들어갔다. 1946년, 리키의 제안 이후 결혼한 아내 레이첼은 그런 그를 곁에서 지지하며, 그가 싸우고 있는 진정한 목적—야구뿐만 아니라 국가 전체의 인종 평등—을 잊지 않도록 도왔다.

메타커스에 따르면, 로빈슨은 이러한 거센 모욕의 물결 속에서도 침묵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종교적 신념에 크게 의지했다. 그는 매일 밤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힘을 달라고 구하는 습관을 지녔다. 그리고 이 기도의 습관은 강한 신앙심을 지녔던 브랜치 리키의 영향 또한 있었음이 분명하다.

시즌이 끝날 무렵, 재키 로빈슨의 이름은 미국 전역의 가정에서 익숙한 이름이 되었다. 그는 타율 .297을 기록하며 뛰어난 활약을 펼친 끝에 1947년 신인왕을 수상했다.

모욕과 비난은 다음 시즌까지 이어졌지만, 또 한 번의 전환점이 신시내티에서 찾아왔다. 관중석에서 로빈슨을 향한 비난이 쏟아지던 중, 팀 동료 피 위 리스가 그에게 다가가 팔을 그의 어깨에 둘렀다. 이 특별한 스포츠 역사 속 순간을 기리기 위해, 2005년 브루클린의 마이모니데스 파크(구 키스팬 파크)에는 두 사람의 모습을 형상화한 청동 조각상이 세워졌다.

피 위 리스(왼쪽)와 재키 로빈슨의 동상은 2005년 공개되었다.⎟Andrew Burton/Getty Images

그 무렵 다른 흑인 선수들이 메이저리그 야구에 진입하기 시작했다. 그 후 10년 동안, 선수들이 피부색이 아닌 실력에 따라 필드에 배치되는 관행은 표준이 되었다.

로빈슨은 이후 야구에서 뛰어난 경력을 쌓았다. 은퇴 후에는 여러 성공적인 사업에 참여했으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음식과 주거지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했고, 민권 운동에 활발히 참여했다. 1962년, 다저스에 합류한 지 불과 15년 만에 그는 야구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10년 후, 그는 심장 마비로 아내의 품에 쓰러지며 마지막으로 “사랑해”라고 말했다.

많은 위대한 미국인이 그들의 행동과 말로 미국을 발전시켰다. 재키 로빈슨은 존엄성과 침묵을 통해 같은 일을 해냈다.

*박경아 기자가 이 기사의 번역 및 정리에 기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