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첨단 디지털 시대에도 여전히 사랑 받는 만년필

최창근
2024년 10월 10일 오전 9:43 업데이트: 2024년 10월 10일 오전 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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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스마트폰은 생활 필수품이다. ‘엄지족’이든 ‘검지족’이든 터치만 하면 못 할 일이 없는 세상이다. 이 속에서 쓰는 ‘손맛’을 즐기는 이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중 하나가 손 글씨 쓰기 유행이다. 필사(筆寫) 붐도 만만치 않다. 사람들은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의 ‘장미의 이름’에 등장하는 필사 수도사처럼 ‘성경’을 베끼며 마음의 위안을 얻고 명작들을 따라 쓰며 정화의 시간을 갖기도 한다. 필사책은 이미 새로운 출판 장르로 자리 잡았다. 단순 ‘베껴 쓰기’에 만족하지 못하여 보다 예술적이고 독창적인 ‘나만의 글씨’를 원하는 이들은 캘리그라피(Calligraphy) 세계로 입문하기도 한다.

시중에 출간된 필사 전문 서적으로 필사하는 독자. | 연합뉴스.

검지족들에게 불어온 손 글씨 쓰기 유행 속에서 볼펜, 사인펜에 밀려나 한동안 찬밥 신세였던 만년필도 인기를 더하고 있다. 상승 곡선을 그리는 만년필 업계 매출액 그래프가 이를 증명한다. 올해 10월, 미국 시장조사업체 VMP의 ‘전 세계 필기구 시장 동향 보고서’에 따르면 2023년 전 세계 만년필 시장 규모는 9억 5594만 달러(약 1조 2852억 원)였다. 2030년에는 규모가 11억 7777만 달러(약 1조 4,393억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전 세계 만년필 시장은 연평균 2.51%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다. 이 속에서 만년필도 이른바 잘나가는 아저씨들이 안주머니에서 꺼내던 ‘검고 번쩍이는’ 중후한 옷을 벗고 파스텔톤의 화사한 색깔로 바꿔 입었다. 무게도 가격도 한결 가벼워졌다.

파카 듀오폴드 빅 레드 만년필. 맥아더 원수의 만년필로도 널리 알려졌다. | (주)항소.

사실 만년필은 불편한 필기구다. 가격부터 연필, 볼펜보다 고가다. 만년필을 사용하는 것은 약간의 불편함을 감수한다는 의미를 담기도 한다. 어떤 필기구보다 사용 시 성가신 면이 있다. 샤프는 때때로 심이 부러지긴 하지만 내장 지우개에 박혀 있는 클리너핀을 사용해 조각난 심을 제거해주면 그뿐이다. 샤프심만 넣으면 어린아이도 어렵지 않게 사용할 수 있다. 볼펜, 수성펜도 마찬가지이다. 부러질 리도 없는 내장심이 다 소모되었을 때 새것으로 교체하면 그만이다. 사용량에 따라 수개월 수년을 교체 없이 사용하는 경우도 흔하다. 유독 만년필만이 지속적인 관심을 주지 않으면 까탈을 부린다. 장기간 사용하지 않을 경우 잉크가 말라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서울 종로구의 만년필 전문 매장. 세계 각국 만년필 브랜드 제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 한기민/에포크타임스.

불편함에도 사람들이 만년필을 선호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만년필은 힘을 빼고 써야만 하기에 장기간 필기해도 손에 부담이 없다. 더불어 펜촉 두께, 잉크, 종이 등에 따라 필체, 글씨 번짐이 달라지는 만년필은 ‘나만의 글씨’를 가지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최적의 필기구라 할 수 있다. 사용자의 필기 습관, 필압(筆壓) 등에 따라 펜촉의 모양이 달라지는 이른바 ‘길들이는 과정’을 거쳐 만년필은 유일무이한 ‘나만의 펜’이 된다. 관리만 잘 해주면 만년(萬年)은 못 써도 수십 년, 수백 년을 쓸 수 있다.

무엇보다 만년필은 손끝에서 느껴지는 아날로그적 매력이 넘치는 필기구다. 각 브랜드, 제품별로 저마다 특징이 있다. 만년필 몸체 재질, 도장 방법에 따라 쥐었을 때 느낌이 다르다. 만년필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촉도 스테인리스 스틸이냐, 이리듐(iridium)이냐, 금이냐에 따라 서로 다른 필감을 준다. 얇은 펜촉으로 글씨를 쓰면 빙판 위 스케이트처럼 날카로운 매력이 있다. 두꺼운 펜촉으로 쓸 때에는 설원에서 스키를 타는 듯한 부드러움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매력 때문에 스마트폰 터치에만 익숙하던 검지족들도 만년필 필기 특유의 사각거림을 즐기며 손 글씨 쓰기의 재미에 빠져들고 있다.

‘만년필(萬年筆)’이라 부르는 필기구의 원이름은 ‘fountain pen’이다. 이전의 펜이 글씨를 쓸 때 마다 매번 잉크를 찍어서 사용했던 것에 비해서 몸체(배럴)에 잉크를 저장하여 장기간 사용할 수 있게 한 펜의 탄생은 일대 혁신이었다. ‘잉크가 영원히 넘쳐 나다’를 시(詩)적 표현으로 ‘샘처럼 솟아오르다’라고 표현하여 ‘샘’ 혹은 ‘분수’ 뜻을 지닌 ‘fountain’과 ‘pen’이 합쳐져 ‘fountain pen’이라는 새로운 고유명사가 탄생하였다.

‘만년필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는 루이스 에드슨 워터맨(Lewis Edson Waterman)이다. 미국 보험 설계사였던 그는 1883년 뉴욕에서 고객과 중요 보험 계약서를 작성 중에 잉크가 흘러내려 보험 계약을 망쳐버린 낭패를 경험하였다. 이에 그는 잉크가 흐르지 않는 펜을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워터맨은 모세혈관 원리를 응용하여 잉크가 알맞게 흘러나오도록 만든 근대 만년필의 원형을 만들었다. 연구를 거듭하여 결국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만년필 개발에 성공했다. 이후 쉐퍼(Sheaffer), 파카(Parker) 등 만년필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이들이 저마다의 기술과 노하우를 추가하여 현대적인 만년필로 진화하였다.

젊은 세대를 겨냥하여 출시된 각양각색의 만년필. 사진 속 제품은 독일 국민 만년필로 불리는 라미(LAMY)사 제품이다. | 한기민/에포크타임스.

구미(歐美)가 원향인 혁신적인 펜은 아시아로도 전해졌다. 이를 두고 처음에는 영어 ‘fountain pen’을 직역한 ‘천필(泉筆)’, ‘잉크(먹)를 토해낸다’ 하여 ‘토묵필(吐墨筆)’ 등으로 불렸다. 훗날 ‘잉크만 넣어 오랫동안 쓸 수 있다’는 뜻을 담아 ‘만년필(萬年筆)’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메이지(明治)유신 무렵 일본에서다. 중국·대만 등 중화권에서는 이를 ‘강철로 만든 펜’이란 뜻을 담아 ‘강필(鋼筆)’이라 부르고 있다.

만년필은 오랜 기간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온 필기구이다. 만년필을 사랑한 사람들에는 글쓰기를 밥벌이 수단으로 삼아온 사람들이 빠지지 않는다. 만년필은 작가들의 손에 쥐어져 ‘창작의 도구’가 되어왔다. ‘마음(心)’이라는 작품으로 세대를 뛰어넘어 독자들의 ‘마음’을 울리고 있는 일본 작가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가 주로 사용한 만년필은 영국 오노토(Onoto)사 제품이었다. ‘셜록 홈즈’ 시리즈를 탄생시킨 추리소설 대가 아서 코난 도일(Sir Arthur Ignatius Conan Doyle)은 만년에 파카 만년필로 집필했다. 그는 1920년대 “내가 평생 찾던 펜은 바로 파카”라고 했다. 영국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의 희곡 ‘피그말리온’ 역시 파카 만년필 끝에서 나온 작품이다. ‘무소유’라는 수필로 널리 알려지고 실제 무소유의 삶을 실천했던 고(故) 법정스님도 “한동안 만년필 집착은 버릴 수 없었다.”고 고백했다. 승려이자 유명 작가였던 법정스님에게 만년필은 창작의 도구였다.

작가 마크 트웨인을 모델로 쓴 1900년대 콘클린 만년필 광고(좌)와 워터맨 만년필 광고. | 자료사진.

만년필을 사랑한 대표적인 작가로는 마크 트웨인(Mark Twain)을 들 수 있다. 그는 콘클린(Conklin) 브랜드를 특히 사랑하여 광고에 출연하기까지 하였다. 한국 작가 중 이병주는 쉐퍼, 박경리‧최명희‧최인호는 몽블랑(Montblanc), 박목월‧박완서는 파카 만년필을 사용하여 숱한 명작들을 세상에 선보였다.

이태준은 수필 ‘만년필’에서 아끼던 무어(Moore) 만년필을 잃어버린 애틋한 심정을 표현하기도 하였다. ‘나의 만년필’이라는 수필집을 남긴 박완서는 시조시인 이영도로부터 선물받은 파란색 파카45 만년필로 1970~1980년대 주옥같은 작품들을 썼다. 그러다 실수로 바닥에 떨어뜨려 만년필이 고장 나자, 상심한 나머지 “앞으로는 글을 쓸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미신에 빠지기도 했다.”고 고백할 정도로 만년필 마니아였다. 이처럼 만년필은 작가들과 인연이 깊은 존재였다. 이에 몽블랑, 몬테 그라파(Monte Grappa) 등의 브랜드에서는 작가의 삶과 작품 세계를 모티프로 한 ‘작가 에디션’을 발매하고 있다.

고 최인호 작가의 육필 원고와 생전 사용했던 만년필. | 연합뉴스.

세계 각국 명사들의 삶에서도 만년필은 빠지지 않는다. 2022년 작고한 고(故) 엘리자베스 2세 (Elizabeth II) 영국 여왕은 자주색 파카 51 만년필을 애용했다. 파카사(社)는 1962년부터 현재까지 영국 왕실의 공식 납품 업체 자격을 유지하고 있다. 여왕과 동갑내기였던 고 마거릿 대처(Margaret Thatcher) 총리도 마찬가지였다. “어린 시절 파카 만년필을 갖는 것이 꿈이었다.”라고 밝힌 그는 총리 재임 시 거의 모든 서명을 파카 만년필로 했다. 고 박정희 대통령도 파카 만년필을 애용했다. 그가 애용한 파카75 만년필은 1964년 파카사 창립 75주년에 맞추어 출시한 모델이다. 삼성그룹 창업주 고 이병철  회장은 늘 워터맨 만년필을 사용했다. 메모광에다 명품만을 고집했던 그는 회고록에서 애지중지한 물품으로 워터맨 만년필을 꼽으며 “취미란 사업이나 인생의 교재이다.”라고 밝혔다. 세월이 흘러 2006년 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신임 임원 100명에게 몽블랑 만년필을 선물했다. 몽블랑이 상징하는 성공과 신뢰의 이미지를 선물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더불어 창업주 이병철 회장이 늘 강조한 기록의 중요성을 다시금 전해주기 위해서였다.

영국 런던의 해러즈백화점에 입점한 몽블랑 상감청자 만년필. | 연합뉴스.

각국 정상(頂上)들도 파카, 몽블랑 등에서 제조한 만년필을 애용했다. 그중 이탈리아 만년필 브랜드 몬테그라파는 유독 러시아 대통령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러시아 초대 대통령 보리스 옐친(Boris Yeltsin)은 2000년 블라디미르 푸틴(Vladimir Putin)에게 자리를 넘겨주며 자신의 몬테그라파 만년필 ‘더 드래곤’을 물려줬다. ‘권력 이양’ 의미를 담은 것이다. 이후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Dmitry Medvedev)도 대통령 재임 시 주요 서류들을 모두 몬테그라파 엑스트라1930으로 서명했다. 역대 미국 대통령들은 파카 만년필을 사용했으나 빌 클린턴(Bill Clinton) 대통령 이후 현재까지 ‘백악관 공식 납품 펜’은 미국 브랜드 크로스(Cross)로 바뀌었다. 미국에 시원을 둔 파카사가 경영난 때문에 제조 거점을 프랑스로 옮긴 것이 주 원인이다.

만년필은 인류의 역사적 순간에도 함께했다. 러일전쟁을 종식 지은 1905년 포츠머스조약, 1919년 제1차 세계대전 강화조약에는 순금 도장된 워터맨 만년필이 조약 조인에 사용됐다. 1927년 33시간 무수면 단독 비행으로 대서양을 횡단한 찰스 린드버그(Charles Lindbergh)는 “나의 여행에 동반한 것은 탐험 정신과 나의 충실한 벗 워터맨뿐이었다.”라고 밝혔다.

제2차 세계대전 유럽전선 종전 협정 서명 후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원수가 파카51 만년필 두 자루로 승리를 의미하는 ‘브이(V)’ 자를 만들어 보이고 있다. | 자료사진.

1945년 5월, 제2차 세계대전 연합군 대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Eisenhower) 원수가 독일의 항복 문서에 서명할 때 파카51 만년필을 사용했다. 아이젠하워는 서명식이 끝난 후 파카51 두 자루로 승리를 상징하는 ‘브이(V)’ 자를 만들어 보이기까지 했다. 그해 9월, 일본 도쿄만(灣). 미국 전함 미주리호 함상에서 열린 일본 항복식에서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원수는 파카 듀오폴드 만년필로 조인했다. 파카사 창립 51주년을 맞이하여 1939년 개발된 파카51은 단일 품종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만년필로 기록에 남았다.

1953년 고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대관식 기념으로 특별 제작된 파카 듀오폴드 만년필.| parkerpens.net.

영국령 홍콩 주권을 중국에 반환하기로 한 1984년 ‘중영공동성명(홍콩반환협정)’에서 자오쯔양(趙紫陽) 중국 국무원 총리는 중국산 영웅(英雄·Hero) 만년필로 서명했다. 영웅 만년필은 1987년 마카오반환협정, 2001년 상하이협력기구(Shanghai Cooperation Organization) 출범, 2001년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등 중국의 역사적 순간에 함께했다.

1987년 12월, 미국 워싱턴 D.C에서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 미국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 소련 대통령은 파카 만년필로 ‘중거리핵전력(INF)협정’에 공동 서명했다. 협정은 냉전시대의 종결을 상징하는 조약으로 역사적인 의미를 가진다. 두 정상이 사용한 파카75는 각 대통령의 이름이 각인된 특별 제작 만년필로 화제가 됐다. 1990년, 조지 허버트 부시(George H. W. Bush) 미국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할 때도 역시 파카75가 사용됐다.

1963년 독일-프랑스 우호조약이 맺어질 당시 독일을 방문한 존 F. 케네디 미 대통령에게 몽블랑 마이스터스튁 149 만년필을 건네는 콘트라 아데나워 독일 총리. | 연합뉴스.

1990년 10월 헬무트 콜(Helmut Kohl) 서독 총리와 로타어 데메지에르(Lothar de Maizière) 동독 총리가 ‘통일조약서’에 몽블랑 마이스터스튁 만년필로 각각 서명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독일 분단에는 미국산 파카 만년필이 사용됐다면, 독일 통일에는 독일산 몽블랑이 쓰였다.

2001년 8월 23일 전철환 당시 한국은행 총재가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빌린 차입금 중 최종 잔여분을 갚는 상환서에 서명하고 있다. 서명시 국산 아피스 만년필이 사용됐다. | 한국개발연구원.

한국의 아픈 기억 속에도 만년필은 자리한다. 6·25전쟁 이후 최대 국난으로 꼽히는 1997년 12월, 한국의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신청 조약 서명에는 임창열 당시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이 몽블랑 만년필을 사용했다. 4년이 흘러 2001년 8월, IMF 졸업장(구제금융 최종상환증서) 서명은 전철환 당시 한국은행 총재가 국산 아피스 만년필을 사용했다. ‘IMF 졸업’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은 전철환 총재의 세심한 연출이 가미됐다. 그는 서명을 며칠 앞두고 “한국산 만년필로 서명하겠다.”고 밝혔다. “한국의 경제 주권을 되찾는 순간인데 외제 만년필로 서명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국내 만년필 업체 상당수가 IMF사태를 겪으며 생산을 중단한 상태였다. 직원들은 수소문 끝에 만년필 생산 업체 한 곳에 연락이 닿았다. 1956년 설립된 국내 최초의 만년필 제조업체 아피스(APIS)였다. 한국은행의 ‘특별한 부탁’에 아피스는 만년필 한 자루를 기증했다. 현재 만년필은 한국은행 화폐박물관에 전시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