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교육의 청사진을 제시한 카라치 가문의 열정

제임스 바레셀(James Baresel)
2024년 05월 25일 오후 12:31 업데이트: 2024년 05월 25일 오후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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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이탈리아 카라치 가문의 세 형제는 당시 예술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미술 사조를 선도했다. 그들은 인체 소묘를 강조하는 최초의 주요 예술 학교를 설립했다. 매너리즘이 예술계에 미친 부정적인 영향을 타파하려는 열망에서 출발한 이 교육기관은 자연과 사람에 대한 새로운 연구를 바탕으로 고전과 전통의 아름다움을 회복하고자 했다.

카라치 형제가 설립한 학교는 회화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식을 공유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작했지만, 결국 이탈리아 미술계가 처한 침체 상황을 반전시켜 바로크 예술의 토대를 마련했고 이후 유럽 전역에 이곳을 참고한 교육기관이 설립됐다.

예술의 쇠퇴

르네상스 시대 후반 예술계에 등장한 카라치 형제는 이미 쇠퇴해 가는 미술계에 초신성과 같은 존재였다. 당시 르네상스 시대(1350~1620년경)는 이미 고대의 업적을 뛰어넘었지만, 그 열기와 발전성은 사그라들어 정체되고 있었고 예술계를 전성기로 회복시킬 위대한 거장은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천사와 함께 있는 마리아와 아이’(1534), 파르미지아니노. 초기 매너리즘 작품 | 퍼블릭 도메인

1510년경, 매너리즘이라 불리는 새로운 예술 양식이 피렌체와 로마에 뿌리내렸다. 이 사조를 추구하는 예술가들은 자연을 연구하는 대신 헬레니즘 조각을 모방해 작품을 완성했고, 반고전주의 시대라 불리는 양식이 인기를 얻었다. 그들은 조화, 대칭, 질서를 중시했던 기존 르네상스의 특징과 반대로 뒤틀린 원근법, 위태로운 자세를 주로 사용했다. 고전 양식을 따르며 새로운 예술 창조를 추구하기보다는 모방과 희화화를 중요시하는 분위기가 예술계 전역에 퍼졌다.

에밀리안 학파

(왼쪽부터) ‘안니발레 카라치의 자화상’(1850), ‘아고스티노 카라치의 자화상’(1590), ‘루도비코 카라치의 자화상’ | 퍼블릭 도메인

카라치 형제는 이탈리아 북부 볼로냐에서 태어나 초기 미술 교육을 받은 후 베네치아로 이주해 배움을 이어갔다. 당시 베네치아는 매너리즘이 지배적이었던 피렌체나 로마와는 다른 양식을 추구했다.

17세기 예술 사조 중 하나인 에밀리안 학파는 귀족을 우아하게 묘사하며 섬세한 아름다움을 추구했다. 이들은 이후 카라치의 혁신적이며 표현적인 양식에 영향을 받아 바로크 미술의 발전에 중추적 역할을 했다.

에밀리아 학파는 후기 르네상스 예술이 매너리즘을 타파하고 새롭게 태어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탈리아 예술계에 있어 영향력은 비교적 작았지만, 그들은 예술의 본질과 전통에 관심을 두고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그들이 추구한 미술은 웅장함과 자연주의, 색채를 강조하며 정서적 공감을 표현하고자 했다.

‘성 세바스티안과 알렉산드리아의 신비한 결혼’(1526), 안토니오 다 코레조 | 퍼블릭 도메인

에밀리아 학파의 특징은 안토니오 다 코레조(1489~1534)의 작품에 확연히 드러난다. 이후 바로크 양식의 출현에 크게 이바지한 인물 중 하나인 코레조는 절제된 감성과 사실적이며 온화한 색채를 주로 사용했다. 또한 그는 르네상스 예술을 복원하고 당시 흐름을 절충하는 데 주안점을 두며 연구를 이어갔다.

‘여행의 아카데미’

코레조뿐만 아니라 당대 많은 예술가는 르네상스 예술의 절충을 위해 많이 노력했다. 카라치 형제는 ‘여행의 아카데미(Accademia degli Incamminati)’라는 이름의 예술학교를 설립해 자신들이 추구하는 예술의 이상향을 퍼트리고자 했다. 그들은 ‘라파엘로의 여성적 선의 우아함, 미켈란젤로의 근육질의 힘, 티치아노의 강한 색채’를 통합해 예술에 표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파르마 피에타’(1585), 안니발레 카라치 | 퍼블릭 도메인

그들은 부드러움과 웅장함을 잘 융화시키고자 했다. 안니발레 카라치의 ‘파르마 피에타’(1585), 루도비코 카라치의 ‘성 프란치스코와 기부자들과 성모와 아이’(1591), 아고스티노 카라치의 ‘성 제롬의 마지막 영성체’(16세기)는 그들이 추구한 예술의 정수로 여겨진다.

‘성 프란치스코와 기부자들과 성모와 아이’(1591), 루도비코 카라치 | 퍼블릭 도메인
‘성 제롬의 마지막 영성체’(16세기), 아고스티노 카라치 | 퍼블릭 도메인

그들이 전파하고자 한 예술의 특징은 당시 궁정화가였던 디에고 벨라스케스와 안토니 반 다이크에게도 전해져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들은 궁정에서 귀족의 초상화를 그릴 때, 힘과 권력만을 강조하던 기존의 흐름에서 벗어나 좀 더 인도주의적이고 온화한 면을 강조함으로써 인간의 진정한 아름다움에 주목하게 했다.

기초와 사실 묘사에 집중하다

카라치 형제는 학교에 또 다른 획기적인 방안을 도입했다. 당시 기존 예술학교에서는 대부분 예술품 모방과 조각품 소묘로 수업을 진행했다. 이는 선임 예술가들의 기법과 미학적 원리를 이해하는 데는 큰 도움이 됐지만, 자연물에 대한 이해나 현실 묘사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들 이전의 라파엘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르네상스 초기 위대한 예술가들은 자연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를 통해 이상적인 형태를 화폭에 묘사했다. 그러나 매너리즘 사조의 영향으로 당시 예술가들은 사실적 묘사에서 벗어나 주로 인체를 과장되게 묘사했다.

‘인체 소묘 수업’(19세기 초), 작자 미상. 캔버스에 오일 | 퍼블릭 도메인

카라치 형제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모작이 아닌 실제 인물을 모델로 한 드로잉과 채색 수업을 기본 과정으로 도입했다. 예술가를 꿈꾸는 이들이 자연을 정확히 묘사할 수 있게 되면 인간의 아름다움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이상적으로 묘사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실물 모델을 묘사하는 것을 강조한 그들의 생각은 곧 미술 아카데미의 표준이 됐고 지금까지도 고전 예술의 필수 전통으로 자리하고 있다.

고전과 전통의 가치

‘성모의 대관식’(1638), 귀도 레니 | 퍼블릭 도메인

변형된 예술을 고전적 웅장함과 아름다움으로 돌리고자 노력한 카라치 형제는 바로크 양식의 선두 주자가 됐다. 또한 예술가를 꿈꾸는 이들에게 올바른 예술을 가르치고자 노력한 그들 덕에 우아한 고전적 예술을 추구하며 17세기 볼로냐 화단을 주도한 귀도 레니를 비롯해 많은 후진을 양성했다.

당시 예술계를 전통으로 회귀시키고자 노력했던 카라치 형제와 그들의 학교의 좌우명에서 그들의 열망이 잘 드러난다. 그들은 ‘과거를 한탄하고, 현재를 혐오하며, 더 나은 미래를 열망하는 이들의 학교’라는 기치 아래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예술계를 바로잡고자 노력했고 그 결과 바로크 미술이 탄생했다.

제임스 바레셀은 파인 아트 감정, 군사 역사, 뉴 에스턴 유럽 등 다양한 잡지에 기고한 프리랜서 작가입니다.

*류시화 기자가 이 기사의 번역 및 기사화에 기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