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진정으로 위대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어떻게 위대한 업적을 이룰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선 ‘위대함’의 의미를 생각해 봐야 한다. 위대함이란 순간의 업적이 아닌 시간과 장소를 초월한 공헌을 의미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위대함을 충족시킨 인물로 부오나로티 미켈란젤로(1475~1564)와 중국 도가(道家)의 서적 ‘장자(莊子)’에 나오는 인물 중 하나인 청(淸)이라는 목공예가를 들 수 있다.
미켈란젤로와 신의 망치
이탈리아 르네상스 3대 거장 중 한 명인 미켈란젤로는 조각가이자 시인, 화가다. 그는 조각상에 대해 “모든 돌덩어리 속에는 조각상이 있고 그것을 발견하는 게 조각가의 임무다. 나는 대리석에서 천사를 보고 그를 자유롭게 해주려 조각했다”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가 실제로 이런 말을 했다는 증거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시를 통해 예술에 대한 그의 사명감을 엿볼 수 있다.
‘불멸의 형상은 왔던 곳으로 돌아가기 위해,
모든 마음을 치유하고 세상을 존중하는 연민에 가득 찬 천사처럼
지상의 감옥에 내려왔다.
또한 신은 은혜로써 공평하시며 존재를 더 나타내지 않으시니
그가 그(대리석) 속에 비쳐 보이기에 그것만으로도 그를 사랑한다.’
미켈란젤로는 시를 통해 지상의 물질에 신이 갇혀있다는 사실을 전하고자 했다. 그는 신은 갇혀있음에도 지상에 연민과 영광을 전하고, 존재만으로도 사랑이 충만하다며 신성한 사랑, 즉 신플라톤주의적 사랑을 언급한다.
신플라톤주의는 기원후 3세기경 플로티노스에 의해 창시된 철학 사조이다. 르네상스기 후기 미켈란젤로와 티치아노 등의 예술가들이 이 사조의 부흥을 도모했다. 이들은 신학적이고 형이상학적 국면에 집중해 16세기 르네상스 예술의 특징인 영웅주의와 이상주의, 자연주의 예술에서 상징적 예술로의 전환점을 만들었다.
이어 미켈란젤로는 신을 향해 감사함을 전했다.
‘나의 투박한 망치가 단단한 돌을
인간의 모습이나 다른 모습으로 만들어내고,
그것을 인도하고, 지켜보고, 잡아주시는 주인으로부터 그 움직임을 끌어낸다면
그것은 타인의 의지와 속도에 따라 움직인다.
이제 내 의지는 신성한 대장장이가
지상에 없는 유일한 힘으로 도움을 주지 않는 한 완성될 수 없다.’
미켈란젤로는 자기가 혼자 조각하는 게 아니라 신의 도움을 받는다고 말한다. 그는 망치를 머리 위로 높이 휘둘러 아름다운 인물을 조각하지만, 그보다 더 높고 크게 휘두르는 망치(신)의 도움 없이는 돌 속 인물의 모습을 드러낼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은 신의 망치가 되어 그에 의해 사용된다는 의미다.
천사를 자유롭게 하는 과정
미켈란젤로가 돌 속에 갇힌 천사를 풀어주는 과정은 교황 율리오 2세(1443~1513)의 무덤을 장식한 미완성 조각품 네 점에서 볼 수 있다. 차가운 돌의 감옥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는 천사의 모습이 생생하게 살아난다. 조각된 피부의 매끄러움은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대리석과 대조를 이룬다.
미완성의 작품은 완성작과 비교할 때 그 대비가 더욱 두드러진다. 율리오 2세의 무덤 장식품 중 완성작인 모세상은 미켈란젤로의 역작 중 하나로 꼽힌다. 그는 신의 도움으로 작품을 완성했고, 이후 조각상에게 “왜 말을 하지 않느냐?”라며 말을 걸었다고 전해진다.
미켈란젤로의 작품은 단순한 모방이 아닌, 살아있는 듯한 생동감이 느껴진다. 바로 여기에 그의 위대함이 있다. 5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의 조각들은 우리에게 엄청난 영감과 놀라움을 선사한다. 이러한 작품을 만든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위대함의 원천이 바로 신이라고 말한다. 그는 신의 손짓을 따라 유연하게 움직여 신성하고 아름다운 작품들을 탄생시켰다.
청, 나무에서 천상을 해방하다
서양의 미켈란젤로가 보인 위대함과 동양 문화의 위대함은 다르면서도 많은 유사점을 가진다.
공산주의가 중국을 장악하기 이전의 문화에서는 미덕과 영성을 위대함과 연관 지었다. 도교(道敎)는 고대 중국에서 오랜 영적인 전통을 지닌 종교로, 고대 중국인들의 영적 버팀목이 되었다. 도교 서적인 ‘장자’는 도(道), 즉 하늘의 도를 따르는 것에 대한 통찰을 전한다.
장자의 이야기 중 하나에는 종 받침대를 만드는 목공예가 청이 등장한다. 사람들은 그의 작품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며 신이 만든 것처럼 여겼다. 그의 빼어난 예술적 재능을 칭찬하는 이들에게 그는 이렇게 답했다.
“나는 단지 목수일 뿐인데 어떻게 예술을 하겠는가? 하지만 내가 하는 몇 가지가 있다. 작품을 만들 때 나는 내 기력을 소비하지 않고,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금식한다. 이러면 정신과 기술력이 집중되며 외부의 모든 방해 요소가 사라진다. 그 후 나는 숲으로 가 나무의 천성을 살펴본다. 최상의 수형(樹形)을 발견한 후 그 위에 종이 얹혀 있는 모습이 보이면 조각을 시작하고, 그렇지 않으면 손을 놓는다. 이 방식으로 나무와 천상의 물품을 일치시킨다. 그렇기에 사람들이 내 작품을 신이 만든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을 품는 것이다.”
청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위대함에 대한 몇 가지를 알려준다. 첫째, 그의 위대함은 자신을 넘어서는 어떠한 존재에서 비롯된다. 그는 자기에게는 예술성이 없다고 겸손하게 말한다. 그가 행하는 금식은 천상의 존재에게 자신을 맡기기 위해 모든 방해 요소를 제거하는 과정이다. 이는 이타심 발현의 일종으로, 하늘과 연결되는 과정의 하나다.
청은 정념으로 하늘을 인식할 때, 하늘의 뜻을 자연물과 일치시켜 작품을 만든다. 즉, 나무 속 작품을 찾아내 그것을 해방해 주려고 조각하는 것이다. 그는 마음을 비워 고요한 상태에서 자신의 목적에 맞는 나무를 찾았다. 이는 하늘의 뜻을 수용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청과 미켈란젤로는 분명 다르지만, 그를 통해 신의 뜻을 행하게 한 것은 동일하다. 청은 이타적인 자세로 하늘의 뜻이 자신을 통해 행해지도록 했고, 결국 위대함을 만들었다.
위대한 모든 것을 추구하다
우리는 이들에게서 위대함을 추구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 신을 추종함으로써 위대함을 추구할 수도 있고, 신의 행동을 모방하는 자세로 삶에 임하여 위대함을 추구할 수도 있다. 또한 우리가 좇는 위대함이 이타심을 기반으로 한 것인지도 고민해야 한다. 아울러 지금까지 우리의 삶에서 위대했던 것은 무엇이며, 앞으로 어떻게 위대함을 좇으며 살아갈지 고민해 봐야 한다.
에릭 베스는 시각 예술 박사 과정 연구소(IDSVA)의 박사 과정 후보자이자 뉴욕주 미들타운에 있는 페이티안 대학의 조교수입니다.
*류시화 기자가 이 기사의 번역 및 기사화에 기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