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 한복판서 요트 난파…38일간 사투 끝 귀환한 가족

아쉬 사라오(Arsh Sarao), 안나 메이슨(Anna Mason)
2023년 09월 13일 오후 6:19 업데이트: 2024년 01월 31일 오전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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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약 50년 전인 1972년, 어린이를 포함한 일가족 6명이 타고 있던 요트가 범고래한테 공격당해 바다 한가운데서 난파됐다. 이후 가족은 구명보트에 올라 나침반 하나에만 의지한 채 무려 38일 동안 태평양을 표류했다. 거북이 피를 마시고, 폭풍우 속에서 빗물을 모으는 방법을 배워가며 구명보트가 가라앉지 않도록 목숨을 건 사투를 벌였다. 그리고 결국 살아남아 귀환했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처럼 들리는가? 가족 중 당시 10대 소년이었던 더글라스 로버트슨은 지난 10일(현지 시간) 에포크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을 생생히 소개했다.

50여 년 전, 더글라스는 부친 더걸, 모친 린다, 11살 쌍둥이 동생 샌디와 닐, 그리고 가족의 절친한 지인 로빈 윌리엄스와 함께 바다에서 구조됐다.

이날 69세의 더글라스는 “우리 모두는 (언제든) 그런 상황에 처할 수 있으며, 우리는 계속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찾아야 한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1971년 영국 남서부 팔머스 해안에서 출발하기 전의 로버트슨 가족|사진=로버트슨 가족 아카이브 제공

난파선

더글라스의 부모님 더걸과 린다 부부는 영국에서 낙농업을 했다. 더걸은 전직 항해사였으며, 린다는 간호사 출신이었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이었지만 화목한 가족이었다.

더글라스가 16살이 되던 무렵, 더글라스의 쌍둥이 동생 중 닐이 “가족이 함께 세계일주를 하자”고 제안했다.

아버지 더걸은 흔쾌히 동의하고 농장을 팔았다. 판 돈으로는 13미터 길이의 요트를 구입했다. 요트에는 ‘루세트’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후 로버트슨 가족은 대서양과 카리브해 일대를 여행했다. 그 뒤로 갈라파고스 제도를 거쳐 뉴질랜드로 향하던 1972년 6월 15일이었다.

1972년 6월 15일, 더글라스의 쌍둥이 동생들 중 한 명인 샌디가 요트 조종석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평화로운 한때였다. 오전 10시, 갑자기 배 측면에 연달아 세 번 큰 충격이 가해졌다. 더글라스는 물속에서 어두운 형체를 목격했다.

더글라스는 에포크타임스에 “너무 단단해서 새 같은 동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며 “‘쾅’ 하는 엄청나게 큰 타격이 느껴졌다. 배는 물 밖으로 튕겨져 나가며 진동했다. 엄청난 굉음이 뒤따랐다”고 당시를 설명했다.

갑판 아래를 내려다보자, 아버지 더걸이 발목까지 물에 잠긴 채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고개를 돌리자 범고래 세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범고래에게서 눈을 떼 아버지를 다시 쳐다본 더글라스는 이번에는 아버지의 허리까지 물이 차오른 모습을 목격했다.

더글라스는 “곧바로 심각한 상황임을 깨달았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배를 버리자고 했을 때 믿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당시 어린 더글라스는 아버지에게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다. 망망대해 한복판이었다. 하지만 아버지 더걸은 “배를 버려야 한다”는 말을 반복했다. 더글라스는 자신이 꿈을 꾸는 게 틀림없다고 여기고 멍하니 있었다.

그러자 아버지는 아들에게 다가와 “구명보트를 가져오너라”라고 지시했다. 그러는 동안 배는 빠르게 가라앉고 있었다.

루세트라는 이름의 요트를 탄 로버트슨 가족|사진=로버트슨 가족 아카이브 제공

배가 가라앉는 데는 단 2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다행히도 구명보트는 그전에 완전히 부풀었다. 더걸은 딩기보트(가장 작은 경기용 요트)도 물 위에 띄우고 구명보트에 연결해 함께 밧줄로 묶었다.

그사이 더글라스는 파도에 휩쓸려 물에 빠졌다가 간신히 몸을 일으켜 보트에 올라탔다. 다른 가족도 모두 무사히 보트에 올라탔다. 다들 추위에 떨고 있었다.

더글라스는 “쌍둥이들이 울고 있었다. 어머니는 ‘무서워할 것 없으니 겁먹지 마’라고 달랬다. 그러자 녀석들은 ‘무서워서 우는 게 아니라 요트를 잃어버려서 우는 거예요’라고 대답했다”고 전했다.

요트가 가라앉기 시작한 순간, 아버지 더걸은 순간적으로 식칼을 챙겼다. 약 6주 후, 로버트슨 가족이 구조됐을 때 식칼은 닳고 닳아 조각만 남아 있었다.

침몰 전, 노련한 항해사인 아버지 더걸은 GPS나 레이더 장비 없이 나침반만 사용해 항해를 했었다. 그런 아버지 곁에서 아이들도 금방 배워 숙련된 선원으로 거듭났다. 사실 더글라스부터가 해군이 되기를 꿈꾸는 소년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가장 긴 세계여행의 한가운데에서 비극을 맞이할 줄은 미처 몰랐다.

그렇게 로버트슨 가족은 생존을 위해 목숨을 건 사투를 시작했다.

사진=로버트슨 가족 아카이브 제공

생존 계획

침몰 사고가 발생했을 때, 이들 6명은 갈라파고스 제도에서 서쪽으로 약 322k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해 있었다. 무선으로 조난신호를 보낼 방법은 없었다. 따라서 육지로 항해를 시도하는 방법밖에는 없었는데, 문제는 식수였다.

더글라스는 “나는 아버지에게 ‘물이 필요하다면 적도무풍대(북반구의 동북 무역풍과 남반구의 동남 무역풍이 수렴하는 영역)로 가자’고 말씀드렸다. 그곳은 무역풍끼리 만나서 항상 비가 내리는 곳이기 때문이었다”라고 과거 아버지와 나눈 대화를 회상했다.

인간은 먹을 게 없어도 며칠을 살 수 있지만, 물이 없으면 살아남지 못한다. 더글라스는 “‘물이 가장 중요하니 물을 구하러 항해해서 물을 더 구한 다음, 그 뒤에 어떻게 할지 결정하자’고 가족에게 제안했다”고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운이 좋으면 적도무풍대에서 역류를 타고 미국 해안으로 되돌아갈 가능성도 있었다. 적도무풍대에는 식량으로 삼을 물고기도 많다는 장점도 있었다. 물고기를 잡으러 오는 선박이 로버트슨 가족을 발견해 구조할 수도 있었다.

적도무풍대로 가자는 더글라스의 제안에 가족들은 조금씩 기운을 차렸다. 더글라스는 “계획이 세워졌고, 계속 나아갈 수 있는 중요한 동기와 집중력이 생긴 덕분”이라고 귀띔했다.

가족은 일출과 일몰을 길잡이로 삼아 느리고 고통스러운 여정을 시작했다. 더글라스는 찢어져 공기가 새는 보트에 계속해서 입으로 바람을 불어넣었다. 모두가 배고픔과 목마름에 시달렸다. 보트에는 식수캔이 딱 하나 있었는데, 가족은 하루에 세 번 돌아가며 한 모금씩 마셨다. 식량은 난파된 요트에서 꺼내온 빵과 오렌지 한 봉지, 레몬 몇 개, 양파 한 봉지가 전부였다.

6일째 되던 날이었다. 저 멀리서 배 한 척이 보였다. 흥분한 가족들은 조명탄을 쐈다. 그러나 우리를 발견하지 못한 배는 그냥 지나가고 말았다. 더글라스는 “그 일은 우리의 사기를 완전히 떨어뜨렸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항해는 계속돼야 했다. 더글라스는 “우리는 극복해야 했다.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 가족은 매일 ‘생존’이라는 말을 되뇌곤 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북쪽으로 항해했다”고 이야기했다.

더글라스 로버트슨의 쌍둥이 동생들과 부모님, 친구 로빈 윌리엄스|사진=로버트슨 가족 아카이브 제공

17일째 되던 날, 마침내 식량이 바닥났다. 열흘 정도 항해하면 무사히 적도무풍대에 당도할 수 있을 줄 알았으나 아직도 도착하지 못한 상태였다. 보트에서는 여전히 공기가 샜고, 그러다 결국 보트 바닥이 떨어져 나갔다. 로버트슨 가족과 지인 로빈까지 6명은 3인용 소형 딩기보트로 옮겨 탔다.

며칠 후, 하늘에 떠 있는 북극성이 가족의 눈에 들어왔다. 적도무풍대에 들어섰다는 의미였다. 그 뒤로도 사흘이 지나서야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더글라스는 “우리는 우리의 계획이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그저 입을 벌리고 비가 내리도록 내버려 두었다. 마치 구원을 받은 기분이었다”며 기억을 떠올렸다.

강력한 폭풍우 속에서 표류하던 어느 날 밤, 어머니 린다는 신이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것을 느꼈다고 말했다.

더글라스는 “어머니는 누군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그때까지 더글라스는 무신론자였다. 그러나 그날 밤 이후, 더글라스는 신을 믿게 됐다.

나아가 더글라스는 거북이 피를 마시자고 제안했다. 읽었던 소설책에 거북이 피를 마시는 내용이 있었던 것을 기억하고 한 말이었다.

거북이를 잡아 피를 빼낸 다음 햇볕에 말려 고기로 만드는 것은 생존을 위해 아주 중요했다. 또한 가족은 수제 장치를 만들어 날치를 잡았다. 심지어 거북이의 지방을 보존해 기름을 만들기도 했다.

난파 순간 요트에서 꺼내 챙긴 어머니 린다의 바느질 바구니에는 카리브해 지도가 담긴 책이 들어 있었다. 가족은 위치를 파악하는 데 지도를 사용했다. 사건을 설명하는 간단한 일일 일지도 작성해 보관했다.

구조 당시 가족의 모습|사진=로버트슨 가족 아카이브 제공
사진=로버트슨 가족 아카이브 제공

구조

구조의 순간은 예기치 못하게 찾아왔다.

코스타리카 해안에서 6일 동안 표류하던 때였다. 가족이 탄 딩기보트에서 약 1.6km 떨어진 곳에서 지나가는 배가 보였다. 가족은 서둘러 조난로켓을 쏘아 올리며 발견되기를 기도했다. 배가 천천히 항로를 바꾸기 시작했다. 일본 함선이었다. 가까이 다가온 선원들은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한 성인 네 명과 누더기 옷을 입은 어린이 두 명이 꽉 들어찬 작디작은 딩기보트를 놀라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38일째 되던 날 오후였다.

“우리는 고대 인류의 원시인처럼 식량을 구하는 법, 물을 구하는 법, 생존하는 법을 배웠다. 우리가 구조되던 그날, 우리는 열흘 치 식량을 가지고 있었다.”

구조 후 가족의 모습|사진=로버트슨 가족 아카이브 제공

선원들이 가족들을 함선 갑판 위로 끌어올린 다음이었다. 아버지 더걸은 “딩기보트도 배에 태워달라”고 부탁했다. 선원들이 이유를 묻자 더걸은 “우리 음식이 거기 있다”고 답했다. 선원들은 “우리에게 음식이 있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달랬다. 그러나 생존력이 강해진 로버트슨 가족은 보트에 있는 음식과 물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더글라스는 덧붙였다.

몇 달 뒤, 더글라스는 다시 바다로 돌아가 선원이 됐다. 이후 결혼해 다섯 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막내딸의 이름을 ‘루세트’라고 지었다.

아버지 더걸은 가족의 난파선 이야기를 책으로 썼다. 책은 베스트셀러가 됐다. 더글은 수익금으로 농장은 물론, 요트도 구입했다. 이후 1992년 세상을 떠났다.

더글라스는 “인생은 아주 가느다란 실에 매달려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생존의 이야기다. 더글라스는 가족의 여정을 언제까지나 기억할 것이라고 에포크타임스에 고백하며 이야기를 끝맺었다.

(왼쪽부터) 네 명의 생존자 닐 로버트슨(64), 더글라스 로버트슨(69), 로빈 윌리엄스(72), 샌디 로버트슨(64)이 지난 10일(현지 시간) 더걸, 린다 로버트슨 부부 묘비 앞에서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사진=로버트슨 가족 아카이브 제공

*황효정 기자가 이 기사의 번역 및 정리에 기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