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절대 잊지 않겠다.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6월 4일 오후 12시, 서울 중구 주한국 중국대사관 인근에서 3세대 중국인들이 이 같은 내용의 피켓을 들고 톈안먼(天安門) 사건 34주년 기념집회를 가졌다.
1989년 톈안먼 사건은 ‘톈안먼 민주화 시위’ 혹은 ‘톈안먼 학살’로도 불린다. 사건이 발생한 1989년 6월 4일은 일요일이었다. 이날 새벽, 중국 인민해방군은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서 전날 늦게까지 민주화 요구 시위를 하다가 잠든 학생과 시민 등 시위대를 무참히 학살했다. ‘인민 해방’을 위해 창립됐다는 당의 군대가 그 인민에게 실탄을 발포하고 탱크로 잠든 학생과 시민을 깔아뭉갠 것이다.
일주일 뒤 중국 당국은 당초 시위 주도자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약속을 뒤집고 수배령을 내렸다. 다수 지식인이 체포돼 중형을 선고받거나 국외로 망명했다. 그때부터 중국에서는 ‘64’ ‘89’ 같은 숫자나 ‘학생’ ‘탱크’ 등 조금이라도 해당 사건을 연상시키는 표현은 금지어가 됐다.
공교롭게도 34년 전과 마찬가지로 올해 6월 4일도 일요일이었다. 이날 서울 중구 명동 중앙우체국 앞에서 열린 기념집회에는 톈안먼 사건 생존자, 중국 출신 인권 탄압 피해자, ‘백지 혁명’ 참여 중국 유학생 등 3세대 중국인이 함께 자리했다.
중국 베이징 태생 언론인 성쉐(盛雪)는 “톈안먼 사건 때 나는 베이징에 있었다. 나는 당시 중국에서 일어난 민주화 운동의 참여자이자 중국 당국이 자행한 유혈 진압의 목격자이다”라고 말했다.
성쉐는 앞서 중국 국무원발전연구중심 산하 ‘관리세계’ 잡지사에 몸담고 있었다. 톈안먼 사건 발생 직후인 1989년 8월 캐나다 토론토로 갔다. 이후 미국 자유아시아방송(RFA) 캐나다 특파원, 독일 ‘도이체 벨레(독일의소리)’ 방송 북미 특파원 등을 역임했다.
성쉐는 “우리는 34년 이래 매년 세계 각 지역에서 톈안먼 사건 희생자를 추모하고 중국 당국을 규탄하는 행사를 개최해 왔다. 이는 중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추진하는 노력의 일환이기도 하다”면서도 “중국 당국은 이미 전 세계에 침투했으며 중국 당국의 탄압 수단은 예전보다 더 잔인하고 다양해졌다. 다행히 국제 사회는 중국 공산당의 폭정, 민주주의 국가에 대한 침투, 세계 평화에 미치는 악영향을 점차 알아가기 시작했다”며 민주주의 운동을 이어갈 것을 다짐했다.
전직 중국 공안(경찰) 출신 이(李)모씨는 톈안먼 사건 발생 당시 고등학생이었으며 직접 사건을 겪지는 않았다. 그는 중국 당국의 박해를 받은 후 지난 2010년 한국으로 망명했다.
그는 중국 공안 재직 당시 겪은 사례를 소개하며 “중국 당국의 이른바 ‘인민 경찰’은 인민을 보호하는 경찰이 아니라 중국 당국의 탄압 도구이다”라고 말했다. “중국 사회에서 나처럼 공산당 교육을 받은 공안도 박해받았다. 일반 시민들이 처한 환경은 더욱 열악하다”고 그는 말했다. 그러면서 “식빵 대신 자유를 원한다. 공산당을 타도하자. ‘중국몽’ 필요 없다. 우리는 스스로 꿈을 꾼다”고 외쳤다.
이날 행사에는 지난해 말 ‘시진핑 퇴진’ ‘공산당 퇴진’을 요구하며 백지 시위를 한 중국 유학생들도 참여했다.
유학생 A 씨는 에포크타임스에 “나는 톈안먼 사건 발생 이후에 태어났다. 지난해 11월 26일 한국에서 진행한 ‘백지 혁명’을 계기로 ‘반공’ 대열에 합류했다. 중국 공산당의 악행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중국 공산당을 반드시 해체해야 한다”며 이날 행사에 참여한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우리는 중국 내 다수 시민과 연락하며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시진핑 치하 중국 공산당 정부는 사면초가인 상황에 부닥쳐있다. 머지않아 중국에는 큰 변화가 일어날 것 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