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때로 마법 같은 날이 있는 것 같습니다. 희귀한 품질의 빛이 온몸을 사로잡는 그런 날 말입니다.“ – 맥스필드 패리시
맥스필드 패리시의 예술은 20세기 컬러 인쇄와 대량 유통의 혁신 덕분에 그의 생애 동안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사랑받았다. 그는 신고전주의적 이미지로 유명한 화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였다. 그의 작품은 아동 도서 삽화, 광고, 그리고 라이프(Life)와 하퍼스 바자(Harper’s Bazaar)를 포함한 인기 있는 정기 간행물의 표지를 장식하는 등 광범위한 성공을 거뒀다.
당시 다작을 하는 일러스트레이터와 상업 예술가들은 유명 인사의 지위를 누렸는데, 페리시의 작품이 인기를 끌면서,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데이브레이크(Daybreak)’는 1925년 미국 가정 5가구 중 1가구가 소장할 정도로 많은 복제품이 팔렸다.
이러한 추세에 따라 ‘데이브레이크’는 20세기를 통틀어 가장 인기 있는 판화가 됐다. 코발트블루의 한 색조인 ‘패리시 블루’는 패리시 그림의 특징인 포화적이고 초현실적인 색상을 기리기 위해 붙여진 이름이다.
예술가로서의 성공 덕분에 그는 가족을 위해 울창한 나무가 많은 아름다운 부지를 사서 집을 지었고, ‘디 오크스(The Oaks)’라고 명명했다. 이곳은 패리시에게 70년 가까이 사적이고 창의적인 왕국이 돼 주었다.
예술적 혈통

맥스필드 패리시는 1870년 7월 25일 예술가 스티븐 패리시의 아들로 태어났다. 맥스필드가 태어났을 당시, 그의 아버지는 이미 지역 풍경을 그린 에칭화 작품들로 필라델피아에서 존경을 받고 있었다. 기성 예술가의 아들이었던 어린 프레드릭(나중에 할머니의 결혼 전 이름인 맥스필드를 따름)은 아버지와 함께 스케치를 배웠다. 그는 14세 때 유럽으로 떠난 긴 가족 여행에서 예술적 재능을 키우도록 격려받았다. 그곳에서 그는 옛 거장들의 작품을 직접 볼 기회를 가졌고 파리의 한 미술학교에서 정식 학업을 시작했다. 미국으로 돌아온 패리시는 하버포드 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한 후 펜실베이니아 예술대학에서 순수미술을 전공했다.
아버지와 친밀했던 페리시는 졸업 후 매사추세츠에서 스튜디오를 함께 사용했다. 몇 년 후, 아버지를 따라 뉴햄프셔의 플레인필드와 코니쉬 마을에 위치한 코니쉬 아트 콜로니로 이사했는데, 이 지역에는 많은 예술가, 작가, 공연가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
패리시는 강 건너편에 땅을 사서 작은 집을 짓고 ‘디 오크스(The Oaks)’라는 이름을 붙였다. 당시 뉴햄프셔에서 가장 큰 나무들과 함께 웅장한 참나무(oak)들이 이 부지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건축을 전공한 패리시는 자신의 집을 설계했고 인근 이웃 목수인 조지 S. 러글스의 도움을 받아 집을 지었다. 1898년에 두 개의 침실로 소박하게 시작한 이 집은 수년에 걸쳐 15개의 방과 5개의 욕실로 확장됐다.
패리시는 미술 강사인 아내 리디아 오스틴과 사이에 네 명의 자녀를 뒀다. 후에 집에서 작업에 집중하기 어렵다고 생각한 그는 스튜디오를 지었는데, 스튜디오에는 사진 암실과 잘 갖춰진 기계 작업장을 포함해 여덟 개의 방이 더 들어섰다.
그림 그리는 기계공

패리시는 왕성한 창작 활동을 이어갔는데, 거의 900여 점에 달하는 작품을 제작했다. 뉴햄프셔에 있는 자택 스튜디오에서 그는 어린이와 어른 모두를 신비로운 신고전주의 세계로 안내하는 그림을 그렸다.
‘어린 시절의 시(Poems of Childhood)’부터 ‘아라비안나이트(The Arabian Nights)’까지 그의 상상력 넘치는 그림은 독자들에게 소설 작품을 더욱 현실감 있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됐다. 그는 채도가 높은 색채로 가득한 이미지, 그리고 따뜻한 색과 차가운 색의 대비를 통해 그의 거대한 세계 속 캐릭터들을 생동감 있게 만들고 특별한 입체감을 입혔다.
동화책 속 그의 작품들이 보여준 캐릭터들은 젊고 아름다운 모습에서부터 풍화되고 기괴한 모습까지 다양했는데, 이들은 매우 높은 품질로 창조됐고 숙련된 독창성으로 만들어진 진정한 작품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주로 극적으로 아름다운 풍경으로 둘러싸인 젊고 순수한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이미지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패리시는 특히 장엄한 자연환경을 배경으로 한 여성들의 초상화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1931년, 61세의 패리시는 AP 통신에 이렇게 발표했다: “바위 위의 소녀들과는 이제 끝입니다! 13년 동안 그려왔는데 앞으로 13년은 더 그려서 팔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것이 상업 예술 게임의 위험성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틀에 박힌 일을 반복하도록 유혹하지요. 고무 스탬프가 되는 것은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이라도 할 수 있을 때 틀에 박힌 일을 그만두려고 합니다.” 그는 그 시점부터 주로 풍경화에 집중했다.
패리시는 색채가 화려하면서 몽환적인 작품을 만들기 위해 ‘매우 단순하고, 매우 오래됐으며, 매우 힘든’ 페인팅 프로세스를 사용했다. 단색 언더 페인팅으로 시작해 각 컬러 레이어 사이에 투명한 유약을 바니시와 함께 겹겹이 덧칠했다. 각 층은 다음 층을 적용하기 전에 10~14일 동안 건조됐다. 이 과정을 통해 그는 전통적인 색상 혼합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눈부시게 빛나는 색상을 구현할 수 있었다.
이 페인팅 기법의 건조 과정이 길기 때문에 패리시는 여러 프로젝트를 동시에 진행했다. 그림을 그리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던 자칭 ‘그림 그리는 기계공’은 모형, 가구, 꽃병 등을 만드는 등 다른 창작 활동에도 기꺼이 시간을 할애했다.

근대 르네상스 시대의 인물인 패리시는 자신의 기계 작업장을 이용해 그림의 참고 자료로 사용할 모델을 제작하고 사진을 찍었다. 그는 지역 모델들을 촬영했는데, 여기에는 자신의 자녀와 유모 수잔 르윈도 포함됐다.
패리시는 또한 프로젝터를 이용해 사진 네거티브를 트레이싱 페이퍼로 옮기는 기술을 사용했다. 이를 통해 그는 이미지 크기를 조정해 정확한 치수를 얻고 대칭과 황금 비율에 따라 기하학적 관계를 만들 수 있었다. 패리시의 많은 작품은 이러한 비례 관계를 구축하는 데 도움이 되는 기둥과 기타 신고전주의 건축적 특징으로 둘러싸여 있다.
더 드림 가든

1914년, 패리시는 필라델피아에 있는 커티스 출판사 건물 로비에 15×49피트의 기념비적인 벽화를 디자인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는 출판업자 사이러스 커티스로부터 전시를 위한 18개의 높은 패널을 의뢰받은 지 몇 년이 지난 때였다. ‘더 드림 가든(The Dream Garden)’은 훨씬 더 큰 규모의 입구 중앙 장식품으로, 패리시와 루이 컴포트 티파니(Louis Comfort Tiffany)가 처음이자 유일하게 협업한 작품이기도 하다.
패리시의 디자인을 바탕으로 티파니는 총무게가 4톤이 넘는, 10만 개 이상의 무지갯빛 파브릴 유리 조각을 사용해 벽화를 제작했다. 유리 조각은 260가지가 넘는 다양한 색조로 구성됐으며, 이 유리 조각들이 모여 초현실적이고 놀랍도록 아름다운 자연의 풍경을 만들어 냈다. 벽화는 흰색 대리석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앞쪽에는 작은 분수 풀이 있어 마치 신고전주의 건축물이 광활한 자연 경관으로 열리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 벽화는 처음에 뉴욕의 티파니 스튜디오에 전시됐는데 평론가들로부터 큰 호평을 받았다. 그 후 벽화를 해체해 필라델피아의 커티스 빌딩에 설치하는 데 6개월이 걸렸다. 완벽주의자인 두 예술가는 서로의 작품 제작에 특별히 만족하지 못했지만, 벽화는 20세기 후반 동안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필라델피아시는 이 벽화를 철거할 수 없는 ‘역사적 대상(historic object)’으로 지정했다.
이 지정은 1998년 벽화가 카지노 소유주 스티브 윈에게 일시적으로 매각된 후 이뤄졌다. 이 유명한 모자이크를 라스베이거스로 옮기려는 계획은 미술사학자들과 운동가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퓨 자선 재단은 펜실베이니아 미술 아카데미에 350만 달러를 지원하여 작품을 다시 구매하고 역사적인 커티스 빌딩 로비에 작품을 유지하도록 도왔다.
맥스필드 패리시는 여생을 ‘디 오크스(The Oaks)’에서 살았다. 그는 80대 후반 관절염으로 인해 더는 그림을 그릴 수 없을 때까지 작품활동을 했다. 1966년 3월 30일, 미국에서 그의 작품이 다시 영향력 있게 부활하던 시기, 패리시는 향년 9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혜영 기자가 이 기사의 번역 및 정리에 기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