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과학탐구 속 피어난 미술…튤립 파동기의 유산

마리 오스투(Mari Ostu)
2024년 06월 28일 오후 1:21 업데이트: 2024년 06월 28일 오후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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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플랑드르 출신의 미술 상인이자 화가인 암브로시우스 보스샤르트(1573~1621)는 꽃 정물화를 독자적 장르로 확립한 최초의 화가로 꼽힌다. 그는 상징주의와 과학적 정확성을 바탕으로 정교한 꽃 그림을 그렸다. 그의 독자적인 그림 양식은 세 명의 아들에 의해 명맥을 이어갔다.

보스샤르트가 평생을 보낸 네덜란드 남서부의 도시 미델부르크는 네덜란드 황금기 꽃 그림의 중심지가 됐다.

‘명나라 화병에 담긴 꽃들의 정물’

‘명나라 화병에 담긴 꽃들의 정물’(1609), 암브로시우스 보스샤르트. 동판에 유채 | 퍼블릭 도메인

보스샤르트의 1609년 작 ‘명나라(만력제 시대) 화병에 담긴 꽃들의 정물’은 그의 꽃 그림의 전형을 보여 준다. 동판에 유화로 그려진 이 그림은 무채색의 어두운 배경에 다채로운 꽃잎들이 마치 보석처럼 반짝이며 아주 도드라지게 표현돼 있다.

이 화려한 꽃다발은 인위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선명하고 세밀하게 그려졌다. 꽃병에 담긴 꽃들은 개화기가 각기 다르다. 보스샤르트는 자신이 원하는 꽃들의 정확한 조합을 위해 각 꽃을 시기별로 사전에 그려둔 후 하나의 화폭에 다시 조화롭게 배치했다.

그가 정밀하게 그려 넣은 꽃의 배치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 이는 미시적・거시적 발견의 시대였던 네덜란드 황금기의 시대정신을 반영한다.

‘명나라 화병에 담긴 꽃들의 정물’ 속 꽃병의 세부 | 퍼블릭 도메인

세상의 축소판

쿤스트캄머의 예시. ‘예술과 호기심의 방’(1636), 프란스 프랑켄 2세 | 퍼블릭 도메인

16세기 말 네덜란드 전반에는 생동감 넘치는 발견과 탐험 정신이 가득했다. 당시 안경제조업자였던 한스 얀센과 자카리아스 얀센은 1593년 최초의 복합 현미경을 발명했다. 동시대를 살았던 네덜란드인 한스 리퍼세이와 야콥 메티우스는 1608년 망원경을 발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새로운 발명품의 등장은 우주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물질에 대한 문화 의식의 시야를 넓혔다. 보스샤르트는 이러한 새로운 관점에 공감하는 예술가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새로운 관점을 정물화에 적용해 꽃과 물체를 마치 현미경으로 관찰한 듯 그리기 시작했다.

‘명나라 화병에 담긴 꽃들의 정물’ 속 꽃과 조개껍질의 세부 | 퍼블릭 도메인

그의 작품 ‘명나라 화병에 담긴 꽃들의 정물’에는 과학자나 수집가의 시각에서 바라본 이국적인 사물에 대한 감성이 잘 표현돼 있다. 조개껍질, 중국 명나라 시대의 화병, 살아있는 곤충 등 수집품이 함께 포함된 이 작품은 16~17세기 독일에서 각종 수집품을 모아둔 방을 일컫는 말인 ‘쿤스트캄머(kunstkammer)’를 모방해 그려졌다. 쿤스트캄머에는 지질학, 고고학, 자연사, 종교 및 역사 유물, 미술품 등 다양한 범주에 속하는 물품들이 엄선돼 전시됐다. 이른바 ‘경이로운 방’이라 불리는 이 공간은 박물관의 전신이기도 하다.

특별한 꽃

이 작품에 등장하는 튤립, 수선화, 시클라멘, 붓꽃, 장미, 카네이션 등의 꽃은 당시 일반적으로 정원에서 감상하는 식물이었다. 화가이자 미술품 판매상이었던 보스샤르트는 미술 시장의 선호도와 수집가들의 이국적 취향에 맞춰 이러한 꽃들을 배치했다. 또한 그는 부유한 수집가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그들의 관심사에 맞춘 많은 세부 사항을 그림에 배치했다.

이 작품은 동판에 그려졌다. 동판 표면은 매우 매끄럽기에 광택과 균일한 채색이 가능하다. 그 덕에 높은 수준의 사실감을 구현할 수 있다. 그는 유화 물감을 겹겹이 발라 변색하지 않고 오래 반짝이는 질감을 유지하는 생동감 넘치는 작품을 완성했다.

그림 전경의 꽃들은 가장 많은 빛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인다. 반면 어두운 부분에 배치된 꽃은 그림자에 가려져 구도에 깊이감을 더한다. 각 꽃은 겹치는 곳 없이 배치돼 더욱 선명하고 화려하게 보인다.

‘명나라 화병에 담긴 꽃들의 정물’ 흰 백합의 세부 | 퍼블릭 도메인

꽃잎에 불꽃 같은 붉은 줄무늬가 있는 세 송이의 노란색 튤립은 삼각형 구도로 배치돼 꽃다발의 전체적인 균형을 잡아준다. 맨 위에는 흰 백합이 배치돼 흰색 꽃병과 조화를 이룬다.

네덜란드 황금기 튤립 파동

튤립은 원서식지인 중앙아시아에서 오스만 제국을 거쳐 16세기 유럽으로 전파됐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네덜란드는 국제적으로 튤립을 재배하는 대표지로 알려졌다.

튤립은 그 아름다움으로 처음부터 네덜란드인들의 마음을 빼앗았다. 그들의 튤립에 대한 과한 애정은 품종 개발과 효율적 재배에 대한 연구에서부터 수집가들의 투기까지 더해져 17세기에는 ‘튤립 파동’으로 치달았다. 1637년 튤립 파동이 정점일 당시 튤립 구근 하나는 숙련된 장인의 연간 수입의 10배가 넘는 가격에 팔리기도 했다.

가장 비싼 꽃

‘셈퍼 아우구스투스’(17세기), 작자 미상 | 퍼블릭 도메인

17세기 가장 비싼 가격으로 거래됐던 셈퍼 아우구스투스는 꽃잎에 불꽃 같은 줄무늬가 있는 튤립의 한 종류다. 이 꽃은 높은 희소성 때문에 더욱 많은 인기를 얻었다. 1624년에는 이 꽃은 단 12송이만 존재했고, 한 개인이 모두 소유했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한정된 공급에 꽃의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꽃이 있는 정물’(1639), 한스 볼론기르 | 퍼블릭 도메인

오늘날 이 종은 멸종했지만, 우리는 여러 예술 작품 속에서 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네덜란드 황금기의 정물화가 중 한 명인 한스 볼론기르(1600~1645)는 ‘꽃이 있는 정물’(1639)에 이 꽃의 화려함을 아름답게 담아냈다.

20세기 영국의 원예 작가 안나 파버드는 저서 ‘튤립’에서 이 꽃에 대해 “튤립 파동이 거세지기 이전부터 이 꽃은 걸작으로 여겨졌다. 우리는 오늘날 더는 이 불꽃을 품은 꽃을 가질 수 없지만, 17세기 네덜란드 화가들이 영감받아 그린 많은 그림을 영원히 간직할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새로운 시각에서 탄생한 걸작

‘명나라 화병에 담긴 꽃’(1628), 발타자르 반 데르 아스트 | 퍼블릭 도메인

과학기술과 국제 무역의 발전으로 탄생한 아름다운 꽃 셈퍼 아우구스투스는 비록 현재 그 실재가 전해지고 있진 않지만, 발전의 시류에서 생겨난 새로운 미술 기법으로 탄생한 수많은 걸작은 지금까지도 우리 곁에 남아 무한한 감동과 영감을 전하고 있다.

마리 오스투는 미술사와 심리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그랜드 센트럴 아틀리에의 핵심 프로그램에서 고전 드로잉과 유화를 배웠다.

*류시화 기자가 이 기사의 번역 및 기사화에 기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