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침공에 대응해 국제사회가 제재를 가하는데도 러시아가 올해 계속 기록적인 경상수지 흑자를 내고 있다고 러시아 중앙은행이 발표했다.
러시아의 경상수지 흑자는 에너지 및 원자재 해외 판매로 수입이 급증하면서 1년 전보다 3배 이상 증가했다.
국제사회 제재에도 지속적인 흑자 기록
러시아 중앙은행이 지난 9일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7월까지 경상수지 흑자는 1670억 달러(약 218조원)로 지난해 같은 기간의 500억 달러(약 65조원), 올해 상반기(1~6월) 1385억 달러(약 181조원)보다 크게 늘었다.
지난달 11일 발표한 러시아 중앙은행 데이터를 봐도 2022년 2분기 경상수지 흑자는 701억 달러(약 91조원)로 1994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서방 진영이 러시아를 제재하고 러시아가 서방에 맞불 제재를 가하는 상황에서 러시아의 경상수지 흑자는 이어지고 있다.
서방의 제재에도 중국, 인도 등이 러시아산 석유와 천연가스 수입에 열을 올리고 있는 반면 제재에 동참한 유럽은 에너지 수급에 어려움을 겪는 문제가 생기면서 대(對)러 제재가 한계에 직면했다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다.
EU “러시아 제재에 전략적 인내 필요”
실제로 지난 13일 국제에너지기구(IEA)는 러시아의 6월 석유 수출액이 204억 달러(약 26조 원)로 전월보다 7억 달러(약 9천억 원)가량 증가했다고 밝혔다. 이는 작년 월평균보다 40% 높은 액수다.
IEA는 국제 유가 상승 덕분에 러시아가 석유 판매로 월 약 200억 달러(약 26조 원)를 벌어들이고 있다고 밝혔다. IEA는 러시아의 수출량이 우크라이나 침공 전 수준으로 회복됐으며 인도와 중국이 제재에 따른 미국과 유럽의 수요 감소를 상쇄했다고 분석했다.
이런 현실을 두고 주세프 보렐 유럽연합(EU) 외교안보정책 대표는 지난 17일 성명을 통해 “러시아가 침략을 중단하고 우크라이나가 주권을 완전히 회복할 때까지 전략적 인내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보렐 대표는 “많은 사람이 ‘러시아에 대한 제재가 효과적이냐’고 반문한다”며 “대러 제재는 블라디미르 푸틴과 그의 공범자들을 여러 면에서 강타하고 있으며, 특히 러시아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더욱 커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러시아가 서방의 제재에도 불구하고 에너지 수출 증가는 물론 루블화 환율 방어까지 성공하자 제재 무용론 목소리는 가라앉지 않고 있다.
루블은 우크라이나 전쟁 초기에 달러당 143루블(약 3천 원)로 떨어졌다가 지난 6월 달러당 61루블(약 1천 원)로 오히려 가치가 달러화 대비 28.0% 상승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시작한 지난 2월 말부터 유럽으로 수출하는 천연가스 대금을 루블화로 받는다고 선언했다. 이와 함께 러시아 중앙은행은 기준금리를 9.5%에서 20%로 두 배 넘게 올리고 기업들이 달러와 유로화 보유분의 80%를 루블화로 교환하도록 강제하는 등 고강도 자본통제 정책을 시행해 환율을 방어했다.
예일대 보고서, “서방의 제재는 러시아 경제에 막대한 타격 ”
한편 일각에서는 서방의 대러 제재가 성과를 내고 있다는 주장도 있다. 제프리 소넨펠드 예일대 경영대학원 교수 연구진은 지난 2일 발표한 보고서를 통해 “러시아는 서방 제재로 전례 없는 자본 유출과 인구 이동을 겪고 있다”며 “러시아는 당초 예상했던 수준 이상의 ‘경제적 재앙’에 직면했다”고 평가했다.
그간 러시아 경제 지표가 호조를 보인 것을 두고 보고서는 “크렘린궁이 불리한 경제 지표는 제외하고 유리한 지표만 내놓는, 이른바 ‘체리피킹’을 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러, 실물경제에 타격 크고 에너지 시장에서도 불리
보고서에 따르면 서방 제재가 시행되자 1000개 이상의 글로벌 기업이 러시아에서 금융·패션 등 전 산업 분야에 걸쳐 사업을 축소하거나 철수했다. 연구진은 이들 기업이 철수한 서비스 가치가 6000억 달러(약 779조원)에 달한다고 추산했다. 이는 러시아 국내총생산의 40%에 해당한다.
이는 구소련 붕괴 이후 외국인 투자를 통해 발전을 이뤄온 러시아의 시장경제를 30년 전으로 후퇴시킨 것과 같은 효과라고 보고서는 분석했다.
보고서는 러시아의 에너지 시장도 큰 타격을 받았다고 분석했다. 중국과 인도로 석유를 수출하지만 그 가격이 매우 낮아 장기적으로 득이 될 게 없으며 천연가스의 경우 중국과 인도에 운송 파이프라인이 없어 인프라 구축에 상당한 투자와 시간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게다가 러시아는 천연가스 수출 물량의 83%를 유럽에 공급해왔는데, 유럽은 현재 러시아 화석연료에서 독립하겠다고 선언한 터라 장기적으로는 피해가 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원자재 공급국으로서의 신뢰를 잃으면서 에너지 패권국의 지위를 잃을 것”이라고 보고서는 경고했다. 에너지 수출은 러시아 정부 연간 재정의 60%를 차지한다.
러시아에 대한 압박 수위 유지해야
보고서는 러시아 금융시장도 악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6200억 달러(약 812조원)에 달했던 외환보유액도 절반인 3000억 달러(약 393조원)는 해외 은행 등에 동결된 상태인 데다 나머지도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750억 달러(약 98조원)까지 급격히 줄고 있다.
또한 보고서는 크렘린궁의 재정 상태가 외부 예상보다 훨씬 심각한 수준일 것이라고 관측했다. 러시아의 재정 및 통화 정책에 대해서는 “극단적이고 지속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
보고서는 “서방의 경제 제재는 러시아 경제를 후퇴시켰을 뿐 아니라, 모든 영역을 완전히 마비시켰다”며 “서방 세계는 단일대오로 러시아에 대한 압박 수위를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18쪽 분량의 보고서는 러시아 경제가 서방 제재에도 타격이 없을 것이라는 기존 낙관론에 대해 요목조목 반박했다. 연구진은 투자은행의 미공개 분석 정보와 국제 파트너사 등 러시아 내외에서 얻은 여러 데이터를 종합·분석해 보고서를 작성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