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사 출신 고위급 스파이? 인민해방군 장성의 격정 토로
“세상에 어느 나라에서 외교부 대사가 주재국 간첩이 되나? 그런 예는 지금껏 없었다. 그런데 중국에서 발생했다. 사건은 너무도 치욕스럽고 손해 막심한 것이었다. 다만 이를 공식적으로 알릴 수 없어서 경제 문제를 대고 7년 정도 징역형만 선고한 것이다. 그 대사는 주재국에 근무할 때뿐만 아니라 중국으로 돌아와서도 계속 정보를 제공했다.”
2011년 8월, 진이난(金一南) 인민해방군 국방대학 전략연구소 소장은 내부 강연에서 자국 고위 외교관을 성토했다.
진이난은 강연에서 다른 간첩 혐의자 이름을 열거하기도 했다. ▲뇌물수수와 부패 혐의 등으로 종신형을 선고받은 캉르신(康日新) 전 중국핵공업집단공사 총경리(원자력 산업 정보 판매 혐의) ▲차이샤오훙(蔡小洪) 전 홍콩 주재 중국 공산당 중앙연락판공실 비서장(영국 정보기관에 국가 기밀 제공 혐의) ▲쉬쥔핑(徐俊平) 전 중국 인민해방군 대교(大校·대령~준장 해당) 등이다.
진이난은 저명 군사전략가로서 현역 육군 소장(少將·준장~소장 해당) 신분이었다. 중국군 고위 장교가 ‘국가적 치욕’이라 목소리 높인 사건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제3대 주한국 중국대사 리빈(李濱)이다. 주한 중국대사를 역임한 외교관은 왜 주재국(한국)의 간첩이 됐을까? 리빈은 어떤 인물인가?
리빈은 1956년 베이징(北京)에서 태어났다. 베이징외국어대학 부속 외국어학교 졸업 후 국비 유학생으로 북한 김일성종합대학 조선어문학부에서 조선어(한국어)를 공부했다. 동문수학하던 이 중에는 한 살 연상의 닝푸쿠이(寧賦魁·제4대 주한대사)도 있었다. 대학 졸업 후 1977년 리빈과 닝푸쿠이는 외교관의 길을 걷게 된다.
리빈의 첫 임지는 북한 주재 중국대사관이었다. 5년 근무를 마친 후 국무원 외교부 아주사(亞洲司) 조선처(한반도 담당과)에 근무하며 3등 서기관으로 승진했다. 1986년 평양으로 부임하여 3등 서기관, 2등 서기관으로 1991년까지 근무했다. 1991년 외교부 본부로 복귀하여 조선처 부처장(과장보좌), 처장(과장)이 됐다. 한-중 수교 2년 후인 1994년 서울로 부임하여 주한국대사관 정무 참사관으로 1997년까지 일했다. 이후 다시 북한에서 2001년까지 공사참사관으로 근무했다.
그러다 2001년 10월, 주일본대사로 영전한 우다웨이(武大偉)에 이어 제3대 주대한민국 중화인민공화국 특명전권대사가 됐다. 당시 45세, 중국의 재외공관장 중 가장 젊은 편에 속했다.
김일성종합대 유학, 40대 대사로 파격 발탁…황제의 소년 칙사 논란
리빈이 차기 주한 대사로 내정되자 한국에서는 반대 여론이 들끓었다. 요지는 ‘주재국을 무시하는 처사’라는 것이었다. 리빈의 연령이 40대 중반에 불과하다는 점, 외교부 본부 처장(과장), 북한 주재 공사참사관을 역임하고 막 부사장(부국장)급으로 승진했다는 점, 장·차관 대사를 파견한 한국과 격(格)이 맞지 않는다는 점, 주 북한 대사로는 부부장(차관)급 인사를 임명해 오고 있는 점이 종합됐다.
‘조선일보’는 ‘한국을 격하하는 중국대사 내정자’ 제하 사설에서 “중국 정부는 지금의 평양주재 중국대사를 포함해 북한 쪽에는 언제나 ‘차관급’ 인사를 보내왔다. 그런데 한국에는 초대 장팅옌 대사를 비롯해 주일공사 출신의 현 우다웨이 대사까지 모두 부국장급이다. 양국관계가 최고로 격상돼 있다는 이 마당에서조차 북한보다 두 등급 밑인 ‘부국장’ 카테고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정말 당혹스러운 일일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사설에서는 또한 “중국은 언제까지 ‘존북비남’의 자세를 고수하겠다는 것이며, 우리 정부는 언제까지 이를 ‘정중하게’ 수용만 하겠다는 것인가. 한반도와 남북관계의 특수성에서 볼 때 중국이 차관급을 서울 대사로 보내더라도 우리로선 성이 차지 않을 일이다”며 비판했다. 한 한국 언론은 리빈을 두고 ‘중국 황제의 소년 칙사(勅使)’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일각에서 환영 목소리도 제기됐다. 리빈이 비록 젊지만 남·북한을 오가며 전문성을 쌓았고 30대 중반에 한반도 담당 데스크인 조선처 처장을 역임했다는 점에서였다. 중국 외교부는 “직급에서 최선의 선택은 아니었으나 실무에서는 최선이었다”고 임명 배경을 설명했다.
당시 중국의 재외공관장 중 부부장(차관)급인 1급 대사 파견 국가는 미국·러시아·영국·일본·독일·프랑스·주유엔대표부·주제네바대표부 등 8개 국가와 기구, 사장(司長·국장)급인 2급 대사는 한국 등 60여 개국이었다. 나머지 국가는 부사장(副司長·부국장, 심의관)급을 파견하고 있었다. 다만, 북한의 경우 특수성을 고려하여 부부장급을 임명하고 있었다. 이는 북한 대사와 격(格) 논란을 일으켰다.
논란 끝에 아그레망(agrément·주재국 외교 사절 임명 동의 절차)을 마친 리빈은 2001년 10월, 김대중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정하고 제3대 주한 대사로서 공식 업무를 시작했다.
신임 대사로서 리빈은 호된 ‘신고식’을 치렀다. 2001년 9월 25일, 한국인 신모(당시 41세)씨가 헤이룽장(黑龍江)성 하얼빈(哈爾濱)시 총살장에서 사형됐다. 신씨는 중국에서 마약 사범으로 적발돼 사형이 집행된 첫 한국인이었다. 사형 집행 후에야 사실을 인지한 한국 정부는 리빈 대사와 쉬쯔유(許澤友) 총영사를 외교부로 불러 항의했다. 최성홍 외교통상부 차관은 “이 사건이 한국 국민의 감정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유감을 표명했다.
개고기, 폭탄주 즐기는 중국 대사
사법부 수장인 최종영 대법원장도 “영사 관계에 관한 비엔나 협약에 의하면 상대국 국민을 체포하거나 사망한 경우 즉시 상대국 영사기관에 통보해 주도록 되어 있는데도 중국 정부가 재판 진행 과정이나 사형집행 사실을 한국에 알려주지 않은 것은 양국 간 우호관계에 비춰볼 때 몹시 유감스러운 일이다. 앞으로 비슷한 문제가 재발하지 않도록 중국 정부가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 달라”고 촉구했다.
대사 임기를 본격 시작한 리빈은 유창한 한국어 실력, 친화력을 바탕으로 대사로서 임무를 수행했다. 그는‘서울말’과 ‘평양말’을 구분하여 구사할 수 있었다. 개고기 등 한국식 문화에도 순응했다. 서울 부임 직후인 2001년 12월, 한국신문방송편집인회 주최 조찬 간담회에서는 “한국인의 개고기 식용 논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음식은 문화의 한 부분으로 세계의 모든 것을 한 가지 기준으로 요구해선 안 되며 세계 문화의 다채로움이 인정돼야 한다”면서 보신탕 지지 소신을 밝히기도 했다. 폭탄주도 즐겨 마시며 한국 각계 인사들과 친분을 쌓았다. 서울시 성북구의 대사관저에서는 중국 바이주(白酒)로 제조한 ‘설산비호(雪山飛虎)’라는 폭탄주를 손수 제조하여 접대하기도 했다.
리빈과 주한중국대사관의 행태가 논란에 오르기 시작한 것은 2004년이다. 그해 3월 대만 대선에서 대만 독립론자인 천수이볜(陳水扁)이 신승(辛勝)하여 총통 재선에 성공했다. 5월 20일 취임식이 예정됐다. 당시 여당 열린우리당, 제1야당 한나라당 소속 의원들이 취임식 참석 의사를 밝혔다. 중국대사관은 여·야 대표에게 리빈 명의의 친서를 보내 소속 의원의 대만행을 만류했다.
5월 10일자 ‘중화인민공화국 주대한민국 특명전권대사 이빈(리빈)’ 명의의 서신은 “저희 대사관은 이미 관련 의원님들께 천수이볜 총통 취임식에 참가하는 것을 취소할 것을 권고·요청한 바 있습니다. 총통 취임식은 매우 민감한 정치적 행사이기 때문에 귀당 일부 의원들께서 이와 같은 행사에 참가하신다면 외부에 잘못된 정보를 전달할 수도 있습니다. 행사 참가를 취소하도록 권유해 주시기 바랍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중국대사관은 서한을 보내는 데 그치지 않고 해당 국회의원실에 한두 차례씩 전화를 걸어 천수이볜 총통 취임식에 참석하지 말라고 종용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개인의 생각인가 아니면 중국 정부의 공식 입장인가” 질문을 받은 주한 중국대사관 관계자는 “중국 정부의 입장이다”라고 답했다.
당시 한국 국회의원들에게 전화로 압력을 넣은 당사자는 싱하이밍(邢海明) 정무 참사관, 현 주한중국대사였다. 이를 두고 한국 정치권에서는 “이런 경우가 없었다.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을 우습게 본 것이다. 중국대사관으로부터 전화를 받고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들어 화가 치밀었다”는 격앙된 반응이 나왔다.
‘대만 총통 취임식 가지 말라’ 전직 대통령, 국회의원에게 압박…내정간섭 논란
중국의 압력 속에서도 천수이볜 총통 취임식에는 열린우리당 정세균·이종걸·조배숙 의원, 전병헌·이광철 당선자, 한나라당 이강두·박원홍·김광원·최병국 의원이 참석했다. 이를 두고 리루이펑(李瑞峰) 중국대사관 공보관은 “국회의원들이 대만 총통 취임식에 참석할 경우 어떤 조치가 뒤따르는가?”는 한국 언론의 질문에 “대만에 간 국회의원들은 정치적인 안목이 없는 사람들이다. 소탐대실하는 것이다. 간 의원들은 나중에 중국을 방문하는 데 도움이 안 될 것이다” “어떤 조치보다는 취임식에 참석한 국회의원들을 기억해 두게 될 것이다. 서로 감정을 상하게 한 일에 대해 기억은 해두지만 당장 조치는 없다” 답변하여 논란을 일으켰다. 당시 리루이펑은 30을 갓 넘긴 대사관 소속 3등 서기관 신분이었다.
주한중국대사관의 내정간섭 논란은 2004년 가을에도 재발했다. 10월, 김영삼 전 대통령이 천수이볜 총통의 초청으로 대만을 방문했다. 타이베이(臺北)에서 개최한 기자회견에서 김 전 대통령은 “대만 방문 계획을 감지한 주한 중국대사관이 처음에는 가까운 친구를 통해 설득작업을 벌이다 대사관 참사관을 집에 보내 선물을 전하며 중국 측 입장을 전달했다”며 중국대사관 측의 회유와 압력을 폭로했다.
리빈의 대사 임기 중 한-중이 첨예하게 부딪힌 분야는 이른바 ‘동북변강역사여현상계열연구공정(東北邊疆歷史與現狀系列 究工程·동북공정)’ 문제이다. 한국 고대사가 중국사의 일부 혹은 지방역사라는 요지의 역사 왜곡 공정에 한국에서 반중 감정이 고조됐다. 한국 외교 당국은 리빈 대사에게 항의했다. 이에 리빈은 “학술 문제를 정치화하는 것은 옳지 않다” “역사는 역사이고 현실은 현실이다” “이 문제는 학술적 차원에서 연구하는 것이 좋다”는 입장을 밝혔다. 훗날 리빈은 동북공정 문제와 한국의 반발을 대사 임기 중 마주했던 가장 어려운 문제라 술회했다.
2005년 8월 19일, 리빈은 4년의 주 한국대사 임기를 마치고 이임했다. 후임은 김일성종합대학 조선어문학부 동기동창이자 외교부 입부 동기 닝푸쿠이였다. 외교부 본부 부사장 겸 북핵전담대사를 맡고 있던 닝푸쿠이가 한국대사가 되고, 리빈이 닝푸쿠이와 자리를 맞바꾸게 됐다.
외교부로 귀임하여 북핵 6자회담 중국 측 부대표로서 북핵 문제를 담당하던 리빈은 이듬해 6월, 산둥(山東)성 웨이하이(威海)시 수석 부시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정부 부처의 간부들을 정기적으로 다른 부처 또는 지방이나 기업으로 파견해 일정 기간 현장 경험을 익히게 하는 이른바 ‘괘직단련(掛職鍛煉)’의 일환이었다. 한국대사를 역임한 외교부 부부장급 간부가 지급(地級·성급과 현급의 중간)시 부시장으로 발령 난 것을 두고 좌천성 인사라는 평가도 나왔다.
동기동창 닝푸쿠이와 임무 교대, 웨이하이시 부시장으로 좌천
웨이하이시 부시장으로 일하던 리빈은 2007년 2월, 이름이 부시장단 명단에서 삭제됐다. 이를 두고 2월 27일 정례 브리핑에서 친강(秦剛) 외교부 대변인(현 주미 중국대사)은 “리빈은 ‘조리원직(調離原職)’, 즉 원래의 직위인 웨이하이시 부시장 겸 외교부 부국장 직위를 박탈당했다”고 밝혔다. 리빈은 외교부 산하 국제문제연구소 연구원으로 발령 났다.
리빈이 직무를 박탈당한 이유는 업무상 기밀 누설이었다. 중국 국가안전부와 외교부는 리빈에게 혐의자가 규정된 시간, 규정된 장소에서 조사받는 이른바 ‘쌍규(雙規)’ 처분을 내렸다. 대만 ‘빈과일보(蘋果日報)’는 “술을 매우 좋아하던 리빈 전 대사가 술자리에서 한국 정보기관에 중국의 국가기밀을 누설했기 때문이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리빈이 누설한 정보는 북한 관련 정보였다. ‘북한 유학파’인 리빈은 북한 당국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1983년 6월, 김정일의 최초 중국 방문 때 통역으로 김정일을 안내했다. 18년 후인 2001년 김정일이 상하이(上海)를 방문해서 “천지개벽을 했구먼…”이라고 말할 때 통역 겸 안내원으로 수행한 것도 리빈이었다. 2000년 3월 5일, 김정일이 평양 주재 중국대사관을 찾아가 5시간이나 머물고 있었을 때 공사참사관 리빈이 그를 맞았다. 당시 김정일은 리빈과 5시간 대작(對酌)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9월 27일, 미국 ‘워싱턴포스트’는 중국 공안기관 관계자들의 발언을 인용, “리빈 전 대사는 (일부) 남한 인사들에게 정보원이었는데, 그들은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폐쇄적인 북한 정부에 관한 리빈 전 대사의 깊숙한 내부정보를 활용했다. 그는 2001년부터 2005년까지 주한 중국대사로 근무하는 동안 남한 인사들에게 김정일, 북한, 북-중 관계 등에 관한 정보를 정기적으로 제공했다. 리빈은 이중 스파이였다”고 보도했다.
리빈은 이중 스파이? 경제사범으로 기소
국내 언론에 의하여 리빈의 ‘스파이 혐의’가 본격 보도된 것은 인터넷 매체 ‘오마이뉴스’ 보도를 통해서이다. 2008년 8월 14일, ‘오마이뉴스’는 ‘백성학 회장 사무실에서 중국 대사까지 관리했나?’ 제하 기사에서 한국 검찰의 백성학 영안모자 회장 집무실 압수 수색 과정에서 백 회장이 리빈 전 주한 중국대사를 관리한 것으로 보이는 영문 문건을 확보한 사실이 확인됐다고 보도했다. ‘오마이뉴스’가 입수한 ‘리빈 대사 관련 정책’ 제목의 영문 문건에는 “리빈 전 주한 중국대사에게 ‘암호명'(code name)’을 부여하고 중국으로 돌아간 후 그를 관리하는 계획을 세워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스파이 혐의로 파직된 리빈은 기소되어 7년 형을 선고받았다. 주 혐의는 기밀누설이었지만, 뇌물수수·향응 등 ‘경제 문제’에 초점이 맞춰졌다. 혐의에 비해 가벼운 형이 선고된 배경에는 중국 정부의 체면 문제, 외교부 부부장, 중국 공산당 대외연락부장, 외교 담당 국무위원 등을 역임한 ‘거물’ 다이빙궈(戴秉國)의 구명 노력이 복합 작용했다.
복역 후 리빈은 산둥성 웨이하이시 난하이신구(威海市南海新區) 벤처기술센터 총재로 복귀하여 한국 기업의 중국 진출 업무를 총괄했다.
/최창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