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 경기 남양주시 학도읍 ‘이석영 뉴미디어 도서관’에서 독립운동가 이석영 선생의 첫 추모식이 열렸다.
추모식인 동시에 뒤늦은 장례식이기도 했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자 이석영 선생은 형제들과 결의해 1910년 12월 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떠났다.
양아버지에게 상속받은 남양주 일대의 막대한 땅을 서둘러 팔아 간도에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다.
당시 땅 판 돈은 40만원, 현재 가치로 약 2조원에 이른다.
신흥무관학교는 해방 전까지 김원봉 등 3500여 명의 항일 투사를 배출했고, 이들은 청산리 대첩 등 독립전쟁을 이끌었다.
하지만 윤봉길 의사의 의거 이후 일제의 박해가 극심해졌다.
1918년 일제의 지명수배로 이석영 선생은 중국을 떠돌면서 빈곤하게 지냈다.
1927년에는 가족들이 일제에 몰살당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1934년 2월 16일 중국 상하이 빈민가의 어느 다락방에서 끼니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
아들이 독립운동을 하다 희생된 후였다.
이석영 선생은 상하이 공동묘지에 임시로 안장됐으나 직계 후손이 없어 그동안 장례를 치르지 못했다. 이후 공동묘지 일대가 개발되면서 유해도 사라졌다.
그리고 87년 만에 대한민국 땅에서 이석영 선생의 첫 번째 추모식이자 장례식이 거행된 것.
형제인 우동 이회영 선생, 초대 부통령 이시영 선생 등과 달리 이석영 선생은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석영 선생은 1991년에서야 건국훈장을 받았고, 지난해에는 정부가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기도 했다.
추모식에서 문희상 전 국회의장은 “이석영 선생은 당대 최고의 재산가로 평생 편안함과 부를 누릴 수 있었으나 나라가 일제에 의해 병탄 되자 결연히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가산을 팔아 망명길에 올랐다”며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무장투쟁의 간성을 양성하는데 가산을 모두 투자했다”고 추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