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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지족어촌, 달빛과 바람이 지켜온 전통…죽방렴 멸치 이야기

2025년 09월 23일 오후 7:14
경상남도 남해군 지족어촌 마을 죽방렴. | 에포크타임스경상남도 남해군 지족어촌 마을 죽방렴. | 에포크타임스

죽방렴(竹防簾)은 한국의 전통 어살(魚槎)로, 조수 간만의 차와 바닷물의 흐름을 이용해 물고기를 가두어 잡는 독특한 어업 시설이다. 좁은 해협에 참나무 말목 수백 개를 V자 형태로 박고 그 사이를 대나무 발처럼 엮어 울타리를 만든 뒤, 썰물 때 빠져나가려는 고기가 통발 구조에 걸려들게 된다. 멸치를 비롯해 숭어, 농어, 도다리 등이 잡히며, 친환경적이고 지속 가능한 전통 어업 방식으로 평가된다.

경상남도 남해군 지족어촌 새벽 4시. 김씨 부부는 두 딸의 이름을 딴 작은 배 ‘다정다감’에 올라 바다로 나선다. 집에서 불과 5분 거리의 죽방렴에 닿으면 해 뜨기 전 고요한 수면 위로 은빛 멸치 떼가 물살에 밀려와 출렁인다. 하루의 첫 수확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잡아 올린 멸치는 곧장 어장막으로 옮겨 100도 이상의 국산 천일염을 푼 가마솥에 삶는다. 청정 지하수로 단시간 삶은 멸치는 건조대에서 물기를 뺀 뒤 남해 바닷바람에 말린다. 이후 크기에 따라 세멸(1~2㎝), 자멸(2~3㎝), 소멸(4~5㎝), 중멸(5~6㎝), 대멸(6~7㎝)로 분류되고, 마지막까지 수작업 선별을 거쳐 경매장이나 소비자에게 출하된다.

죽방렴 멸치는 전국 멸치 생산량의 2%에 불과하지만 선도와 맛이 뛰어나 ‘명품 멸치’로 불린다. 기계로 대량 포획한 멸치보다 가격은 2~3배 비싸지만 살이 단단하고 잡내가 적어 요리사와 주부들이 선호한다.

3대째 죽방렴 어업을 이어온 남해군 어민 김씨와 그의 배 ‘다정다감’. | 에포크타임스

“바다는 달님의 시간을 살고, 사람은 바다의 시간을 산다.” 김씨의 말처럼 죽방렴은 태양이 아니라 달의 주기에 맞춰 움직인다. 바다는 하루 두 차례 밀물과 썰물을 반복한다. 초승달과 보름달에 따라 물살의 세기가 달라지고, 어획량도 크게 좌우된다.

죽방렴은 물살이 빠질 때 고기가 갇히는 구조다. 특히 썰물 끝자락인 새벽 무렵이 가장 중요한 시각이다. 자연스레 어민들의 삶도 새벽 출항과 아침 작업, 낮의 정리와 휴식으로 이어졌다. 계절의 흐름에 따라 겨울철에는 조업을 멈춘다. 지족 죽방렴은 1월부터 3월까지 자체 휴업에 들어가는데, 어획량이 적은 시기인 데다 자원을 보호하고 시설 보수를 하기 위함이다.

지족해협은 물살이 빠르고 수심이 깊은 협수로다. 그러나 일 년 중 단 5일, 달과 바람이 맞물릴 때 바다 밑바닥이 드러난다. 이때가 죽방렴 보수의 유일한 기회다. 닳아버린 대나무 말뚝을 뽑고, 길이 6~8m의 새 말뚝을 박아 넣는다. 그물과 통발 구조도 함께 정비한다.

김씨 집안은 3대째 죽방렴을 지켜왔다. 아버지는 열두 살부터 바다에 나갔고, 6·25 전쟁 시기를 제외하곤 평생을 죽방렴과 함께 살았다. “예전에는 죽방렴 하나 있으면 집안이 부자였어요. 어장이 있다는 건, 어디로 나가야 할지 길이 있다는 뜻이거든요.”

1970년대까지만 해도 죽방렴 하나를 관리하는 데 다섯 가구가 달라붙었다. 머슴을 두던 시절을 지나, 지금은 부부나 부자·형제가 함께 운영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장손에게만 물려주던 전통도 달라졌다. 김씨는 은퇴 후 장녀 부부에게 경영을 넘길 계획이다.

죽방렴 어업에는 언제나 변수가 따른다. 어떤 해에는 죽방렴 하나에서 1억 원 수익을 올리기도 하지만 어떤 해에는 그 삼분의 일도 되지 않는다. 김씨는 담담히 말한다. “옛말에 ‘삼년 빚을 하루아침에 갚는다’는 말이 있죠. 바다는 사람 힘으로 조절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인위적으로 고기를 더 들이게 할 수도 없고, 오직 용왕님이 주시는 만큼만 받는 거죠.”

500년 넘게 이어진 지족 죽방렴은 단순한 생계 수단을 넘어섰다. ‘남해 죽방렴 어업’은 국가중요어업유산 제3호로 지정됐고 올해 7월에는 UN 식량농업기구(FAO)에서 지정하는 세계중요농업유산(GIAHS)으로 등재됐다.

오늘날 남해 지족어촌에서는 죽방렴을 활용한 전통 고기잡이 체험, 직접 잡은 생선으로 즐기는 회와 매운탕, 바다 위 대나무 울타리 풍경을 감상하는 생태 관광을 운영한다. 다만 겨울철(1~3월)에는 휴업에 들어가며 봄부터 다시 관광객을 맞는다.

지족해협의 바다는 오늘도 달님의 시간에 맞춰 숨 쉬듯 흐른다. 그 흐름 속에서 어민들은 은빛 멸치를 건져 올리며, 용왕님이 허락한 만큼만 받아들이는 겸손한 마음으로 수백 년 전통을 이어간다.

경상남도 남해군 지족어촌 회관에 비치된 죽방렴 모형. | 에포크타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