尹 정부 ‘국가 R&D 시스템 혁신’이 성공하려면 어떤 전략이 필요할까요?
답변_곽노성 한반도선진화재단 기술혁신연구회 회장
연세대 식품공학과를 졸업한 후 영국 레딩대학교에서 식품규제정책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식품안전정보원 원장, 한양대학교 과학기술정책학과 특임교수,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대통령 자문위원, 식품의약품안전청 자체규제심사위원, 안전행정부 지방자치단체 합동평가단 위원, 국가과학기술연구회 기획평가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최근 윤석열 대통령이 국가 R&D(연구개발) 예산 전면 재검토를 지시했습니다. 어떻게 보시나요?
“이로 인해 과학기슬정보통신부(과기정통부)는 R&D 예산안 법정 제출 시한을 넘기게 됐지만, 이번 대통령의 지시는 매우 시의적절한 것으로 진단합니다. 그간 과학기술계 안팎에서 현행 국가 R&D 시스템에 대한 문제가 지속해 제기됐고, 미중 패권 경쟁 속에서 과학기술의 중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커진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이번에 이 문제가 쉽게 해결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역대 정부에서도 R&D 시스템 개편 시도가 있었지만 성공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혼란을 가져왔고 결국 안 하는 게 차라리 낫다는 묘한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습니다. 특히 기재부로 대표되는 정부와 과학기술계 간에는 뿌리 깊은 불신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다른 나라에는 없는 두 개의 제도가 있습니다.”
-어떤 제도인지 설명해 주세요.
“먼저 ‘민간 전문가의 국가연구개발 예산 심의’ 제도가 있습니다. 국가 R&D 예산은 민간위원으로 구성된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이하 자문회의)의 심의를 거쳐야 합니다. 심의라고 해서 결코 형식적이지 않습니다. 자문회의 산하에 10개의 전문위원회가 있고, 전문위원회에 올라온 R&D 예산에 대해 연구과제 수준까지 검토합니다. 심의기구라 최종 결정을 내리진 않지만, 사실상 당락을 결정할 정도로 영향력이 막강합니다.”
-다른 나라에도 민간위원이 예산을 심의하는 제도가 있나요?
“없습니다. 미국의 대통령 과학기술자문회의(PCAST)는 순수 자문만 하고, 예산·정책 심의는 대통령 소속의 국가과학기술위원회(NSTC)에서 담당합니다. 이 기구는 부처 장관 등 공무원으로만 구성되며 민간위원은 없습니다. 일본도 우리나라처럼 민간위원이 예산을 심의하다 2013년 심의에서 민간위원을 배제하도록 제도를 바꿨습니다. 민간위원이 예산 심의 과정에서 국가 전략을 고려하기보다 자신의 분야 예산 확보에 집중하는 문제가 심각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과학기술정책 전반은 총리 자문기구인 종합과학기술혁신회의에서 심의하지만, 예산은 미국처럼 부처 공무원으로 구성된 과학기술혁신예산전략회의에서 심의합니다.”
-과학기술계가 예산 심의를 주도하게 된 이유가 있습니까?
“가장 큰 이유는 정부 예산 심의에 대한 불신입니다. 그렇다고 과학기술계가 자신의 이해만 챙긴다고 오해하면 곤란합니다. 예전에는 기재부 사무관이 연구사업 수준이 아닌 연구과제까지 일일이 검토했습니다. 그렇다 보니 해당 분야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사무관을 상대로 저명한 연구자가 많은 시간을 기다리다 설명해야 하는 상황이 수시로 발생했고, 때로는 모욕적인 언사를 듣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과학기술계는 국가 R&D 예산 심의 기능을 기재부에서 과기정통부로 이관시키려고 노력했고, 그 결과 지금의 예산 심의 시스템을 갖추게 된 겁니다. 그렇다고 과거의 관행이 크게 바뀌지는 않았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연구개발 예산에 대한 예비타당성 조사입니다.”
-연구개발 예산 예비타당성 조사는 필요한 일 아닌가요?
“선진국에서는 공항과 같은 대형건설 사업을 할 때만 시행하는 이 조사를 우리나라는 국가 R&D 사업에도 적용합니다. 이렇게 정해진 사업은 보통 10년간 지속되기에 환경이 변한다고 사업 내용을 조정하기도 쉽지 않고, 때로는 더 이상 필요 없는 사업도 계속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10년 후 사업화 결과를 예측하는 예비타당성 조사는 매우 무의미한 일입니다. 우선 지금 연구한 성과물이 나중에 어떤 실용화 결과를 가져올지, 또한 언제 그 성과가 나올지 누구도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국가 R&D 시스템에서 우리나라와 다른 선진국의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전략기획 및 실행력이 부족한데 무엇보다 기획력에서 가장 큰 차이가 납니다. 선진국은 전략적 목표를 정하면 이를 달성하기 위해 풀어야 할 과학기술적 문제를 발굴하고 이 문제를 잘 풀 수 있는 연구팀을 찾습니다. 반면 우리나라는 그 순서가 다릅니다. 전략적 목표를 정한 후 관련 연구팀을 찾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고 싶은 연구 주제를 제안받은 다음 그 주제를 전략적 목표와 연결합니다. 얼핏 보면 미국이나 우리나라 모두 전략목표-문제 제시-연구팀 선정이라는 R&D 기획집행 절차를 거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내용을 살펴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미국은 연구팀 선정 이전에 풀어야 할 과학기술적 문제를 발굴했기 때문에 연구가 성공하면 전략목표를 달성할 수 있습니다. 반면 우리나라는 연구가 성공한다고 해서 전략목표를 달성할지 불확실합니다. 전략목표 달성에 필요한 과학기술적 문제를 풀기 위해 노력한 것이 아니라 연구팀이 풀고 싶은 문제만 풀기 때문이죠.”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시나요?
“R&D 필요성이 아니라 예산 확보 여부가 사업의 기획·집행에 절대적 영향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R&D도 시대 조류에 빠르게 반응합니다. 예를 들어 인공지능이 부각되면 국내 인력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관련 예산이 대폭 늘어납니다. 그러면 정작 지금까지 잘하던 연구의 예산은 대폭 줄어들 수밖에 없는데 이런 상황에서 연구자가 생존하려면 자신의 전공에 맞춰 연구과제에 지원하기보다 수주하기 쉬운 과제로 전공을 바꿔야 합니다. 자칫 지금까지 한 연구 성과를 아쉬워하면서 머뭇거리면 실험실 운영조차 어려워지게 됩니다. 연구관리기관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상적 기획으로는 예산을 쓰기 어렵고, 일단 예산을 쓸 수 있는 연구팀을 섭외해서 아이디어를 모아야 합니다. 필요성을 고민하다 보면 배정된 예산도 집행하지 못해 무능하다는 비판을 듣기 십상입니다.”
-또 다른 문제가 있나요?
“우리나라는 부처 간 R&D 영역이 중첩돼 있어 예산 조정 수요가 많은 나라입니다. 일본이나 유럽은 우리처럼 과학기술 전담 부처를 두고 있지만 부처 간 예산 조정 수요가 많지 않습니다. 전체 R&D에서 차지하는 전담 부처의 비중이 최소 절반을 넘기 때문입니다. 반면, 미국은 과학기술 전담 부처가 없는데 그렇다고 부처 간 예산 조정 수요가 많지 않습니다. 국방, 보건의료, 에너지, 우주와 같이 각 부처의 고유 미션에 부합하는 R&D 사업을 하기 때문입니다. 국립과학재단(NSF)과 같이 다른 부처의 R&D 영역과 중복되기도 하지만 전체 R&D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작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는 일본, 유럽처럼 과학기술 전담 부처가 있으면서도 미국처럼 부처별 미션에 맞춰 R&D 사업을 합니다. 어떤 기준을 적용하느냐에 따라 소관 부처가 달라지는데 과기정통부의 비중이 전체 정부 R&D의 1/3이 안 됩니다. 위상은 전담 부처지만 사업 규모로는 전담이란 명칭이 무색할 지경입니다.”
-부처 간 R&D 영역이 중복되는 경우 조정 기능이 중요할 텐데요.
“당연히 부처 간 중복성이 클 수밖에 없는데 이를 조정해야 하는 과학기술혁신본부의 역할에 대한 평가도 그리 우호적이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소속이 과기정통부이다 보니 조정의 공정성 논란이 끊이지 않습니다. R&D 사업이란 게임을 뛰는 선수가 예산 조정하는 심판 역할도 한다는 이유에서죠. 그래서 적극적인 R&D 예산 조정이 어려워요. 비슷한 사업을 여러 부처에서 하다 보니 연구자는 한 과제 제안서를 가지고 여러 부처에 지원할 수 있고, 흐름만 잘 타면 비슷한 내용에 제목만 바꿔 여러 부처에서 수행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선진국처럼 제시한 문제가 아니라 연구자가 풀 수 있는 문제를 푸는 방식이라 크게 바꿀 필요도 없고요. 먼저 본 사람이 임자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입니다.”
-다른 나라에는 없는 민간의 연구개발 예산 심의, 예비타당성 조사, 예산 집행을 위한 사업기획 등을 하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요?
“과학기술 분야 전문성에 대한 그릇된 인식이 존재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연구개발이나 산업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사람이면 정책도 잘 알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국가 R&D 사업을 심의하려면 공무원에게 부족한 ‘전문성’을 가진 민간위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과연 그럴까요? 정책은 거시적인 안목과 이해관계 조정 능력이 중요합니다. 특정 분야에 대한 해박한 지식만으로는 문제를 제대로 풀어낼 수 없습니다. R&D 사업의 타당성 판단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산이 한정적이라 한 분야의 예산이 늘면 다른 분야의 예산은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한 분야에 대한 전공 지식만으로는 부족하고, 포트폴리오를 짤 수 있는 균형 감각이 중요합니다. 예산 편성 과정에 개별 R&D 과제에 대한 전문성까지 필요하진 않습니다. 과제로 풀어야 할 문제만 명확하면 공모 과정을 거쳐 잘하는 연구팀에 맡기면 됩니다. 공무원이 과제의 세부적인 내용까지 일일이 간섭하던 관행이 그대로 남아 지금과 같은 기형적인 모습이 됐습니다.”
-국가 R&D에서 전문성을 살리려면 어떤 전략이 필요할까요?
“전략기획-사업기획-연구수행의 단계별 필요한 전문가를 잘 배치해야 합니다. 미국의 국가 R&D가 경쟁력을 갖는 이유는 필요한 전문가를 잘 활용하기 때문입니다. 전략기획 단계에서는 개별 기술이 아닌 정책에 대한 전문성이 필요하고, 사업기획 단계에서는 해당 기술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이 필요합니다. 연구수행 단계에서는 특정 기술에 대한 깊이 있는 전문성이 필요하죠. 단계별 전문가를 잘 활용하는 미국과 달리 우리나라는 전략기획 단계에 특정 기술 전문가를 활용하고 개별 과제에 정책 전문가가 관여하는데, 이는 전문가를 잘못 활용하는 것입니다.
-이전 정부에서도 R&D 개편을 시도했던 적이 있나요?
“국가 R&D 체계 개편은 어려운 과제입니다. 이명박 정부에서는 산업계 관점에서 개편을 시도해 민간이 주도하는 국가과학기술위원회를 설립해서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이 기구는 3년 남짓 운영하다가 박근혜 정부에서 폐지됐는데 당시 조정 대상인 정부 부처는 물론 현장의 연구자도 조정의 실효성이 낮다면서 폐지에 찬성했습니다. 박근혜 정부 인수위에서는 당선인 지시로 예산 심의 과정에서 민간위원을 배제하는 논의가 있었지만, 기구의 명칭만 위원회에서 심의회로 변경되었을 뿐 심의방식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또 연구관리의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 연구사업관리 전문가(PM) 제도를 도입한 적도 있었지만, 유명무실화됐습니다. 미국에서는 이들이 전문적 의사결정을 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지만 우리는 그 반대입니다. 자신의 권한과 영역을 침범한다고 생각하며 PM이 역할을 못 하도록 공무원과 연구자가 강하게 견제합니다. 각자의 역할과 전문성이 다른데 그걸 구분하지 않기 때문이죠.”
-국가 R&D 체계 개편을 성공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방안이 있다면요?
“우선 공론화를 위한 논의 구조를 만들어야 하고, 경제산업계는 물론 과학기술계도 동의할 수 있는 해결책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런 일은 과기정통부 공무원만으로는 하기 어렵습니다. 논의 과정이 투명하지 않거나 사회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이 의사결정에 참여하지 않으면 지난 20년 동안 있었던 것과 같이 성과는 적고 혼란이 큰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공론화 위원회 구성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인사의 다양성입니다. 과학기술계 인사는 물론 경제산업계 인사도 참여해야 합니다. 특히 첨단 연구개발을 통해 성과를 거둔, 말 그대로 혁신을 창출한 인사가 참여해야 합니다. 과학기술정책 전문가도 필요합니다. 단일안을 밀어붙이기보다 복수안을 두고 장단점을 분석하고 그 결과를 공개해야 합니다.”
원문 보기
한반도선진화재단 한선브리프 통권 264호